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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사는 이씨? 이춘재 친척?" 선입견에 괴로운 화성사람들

중앙일보 2019.11.20 05:00
지난 1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 연쇄살인 사건 전담 수사본부로 전화가 빗발쳤다. 이 사건의 피의자로 입건된 이춘재(56)가 1989년 7월 초등생 A양(당시 만 8세)를 상대로 범행한 뒤 시신을 유기했다고 밝힌 장소 일대를 이날부터 경찰이 수색하자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항의 전화를 건 것이다. 일부 주민은 수색 현장까지 찾아와 "수색을 빨리 끝내 달라", "동네가 노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한 주민은 "끝까지 사건을 해결하려는 경찰의 노력도 이해하고 피해자 가족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워낙 흉흉한 사건이라 동네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춘재 범행에 함께 언급되는 '화성'…주민은 불만

미제였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33년 만에 이춘재로 확인되면서 경기도 화성시 전역이 술렁이고 있다. 초반엔 "범인이 드디어 잡혔다"며 안도하는 분위기였지만 최근엔 화성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커지고 있다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주민이 더 많다.
특히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크다. 이 지역은 현재 대규모 택지개발 등으로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도심지역이 됐다. 원래 거주하던 주민보다는 새로 이사한 사람들이 더 많다. 화성 연쇄살인과 연관성을 몰랐던 일부 주민들은 뒤늦게 사실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춘재가 자백한 '화성 초등생 실종사건'에 대한 시신찾기 수색작업 현장 모습 [뉴스1]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춘재가 자백한 '화성 초등생 실종사건'에 대한 시신찾기 수색작업 현장 모습 [뉴스1]

화성시 병점동에서 만난 주부 최모(35)씨는 "요즘 '화성'에 산다고 하면 이춘재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동탄 산다'고 대답한다"며 "사건이 해결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30년 전 사건이 다시 거론되면서 지역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이춘재의 고향으로 알려진 화성시 진안동의 분위기는 더 심각하다. 거리에서 만난 일부 주민은 이사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진안동에서 만난 30대 여성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다른 동네에서 벌어진 일인 줄 알았는데 뉴스에 '이춘재가 살았던 동네'라며 나온 건물 등이 모두 익숙한 곳이라 깜짝 놀랐다"며 "예전 일이라고 하지만 찜찜해서 이사해야 하나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50대 주민 이모씨는 "10여년 전에 이사를 왔는데 화성에 살고 이씨 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에서 '이춘재 친척인 것 아니냐'고 의심해 황당했다"며 "이춘재 한 명 때문에 화성이 범죄도시 취급을 받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화성시 "범죄 도시 이미지 없애려 노력했는데…" 

화성시도 고민에 빠졌다. 화성시는 그동안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도시라는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 왔다. 화성문화원은 2003년 전국을 강타한 영화 '살인의 추억'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뤘다는 이유로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을 정도다. 2000년대 초반엔 실제로 시의회가 나서 시 이름 변경을 추진하기도 했었다. 
화성시는 이후 '안전한 도시'를 만들겠다며 지역 곳곳에 방법용 폐쇄회로 TV(CCTV)를 설치했다. 2008년 4월엔 화성서부경찰서가 문을 열었고 화성 동탄 1~6동과 병점동 등 12개 행정동을 담당하는 화성동탄경찰서도 지난해 12월 생겼다.
 
화성동탄경찰서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동탄경찰서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하지만 이춘재로 인해 다시 '연쇄살인' 이미지가 다시 강해지자 화성시도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시 내부에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아닌 '이춘재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변사체(變死體)가 발견된 장소를 관할하는 경찰서에서 사건을 처리한다'는 경찰 자체 규정 때문에 '화성'이라는 지명이 붙었지만, 피의자로 이춘재가 특정된 만큼 사건 이름에 피의자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지자체들, 강력 사건에 "우리 지역명 빼달라" 

실제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경기도 수원·화성·군포 등에서 발생한 부녀자 7명에 대한 납치·실종 사건은 최초 '수원 노래방 도우미 살인 사건'으로 불렸다. 그러나 동일범 소행으로 확인되면서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9년 1월 이 사건의 피의자로 강호순이 검거되면서 '강호순 사건'이 됐다. 
화성시 한 관계자는 "그동안은 용의자 등이 확인되지 않아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불렸지만, 이제는 이춘재가 피의자로 검거됐으니 '이춘재 사건'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력 사건에서 지역 명칭을 빼달라는 요구는 예전에도 있었다. 지난해 8월 과천시 서울대공원에서 토막 시신이 발견되자 과천시는 "사건이 발생한 곳은 안양"이라며 '과천' 지명을 쓰지 말 것을 요구했고, 이 사건의 용의자로 변경석이 특정되면서 이후 '변경석 사건'이 됐다. 
과천시가 지역명을 빼 달라고 보낸 협조 공문. [사진 과천시 공문 캡처]

과천시가 지역명을 빼 달라고 보낸 협조 공문. [사진 과천시 공문 캡처]

인천시도 지역에서 발생하는 강력 사건에 모두 '인천'이라는 지명이 붙자 일부 사건의 경우 '인천'이라는 지명을 빼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강력 사건에 지역명이 계속 언급되면 '범죄 도시'라는 인식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임준태 동국대 교수(경찰행정학부)는 "사건명은 지명, 건물, 피해자 이름, 피의자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의 경우 형이 확정되기 전까진 무죄로 보는 '무죄 추정의 법칙' 등으로 피의자의 이름보단 지명 등을 넣어 사건을 명시하는 일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명이 언급되는 사건은 주민에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순기능도 있지만 사건이 자꾸 회자하면 해당 지역에 부정적 이미지를 줄 수밖에 없다"며 "언론 등도 사건에 지명을 붙이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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