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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교육받으면 기소유예” 청년 장발장 막는 검찰의 실험

중앙일보 2019.11.20 00:03 종합 20면 지면보기
권순범(왼쪽) 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부 전주지청장이 MOU를 맺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권순범(왼쪽) 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부 전주지청장이 MOU를 맺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전주지검이 ‘현대판 장발장’을 막기 위한 실험에 나섰다. 생계가 어려워 범죄를 저지른 청년 등에게 고용노동부의 취업 교육을 받는 조건으로 재판에 넘기지 않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전주지검, 생계 범죄 초범 청년에
범죄자 낙인 대신 새 기회 주기로
일각선 “처벌 면하려 속임수 우려”
검 “제도 악용 땐 더 무겁게 처벌”

전주지검은 19일 “고용노동부 전주지청과 지난 9월 10일 업무협약(MOU)을 맺고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른바 물고기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먹고사는 문제로 재범하는 악순환을 막고 청년 취업난이 심각한 전북 지역에도 도움을 주는 게 목표다. 취업성공패키지는 저소득 구직자 취업을 지원하기 위해 2009년 고용노동부가 만든 제도다. 이 프로그램을 조건부 기소유예와 연계한 건 전국 지방검찰청 가운데 전주지검이 처음이다.
 
이 제도는 권순범 전주지검장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지난 7월 전주에 부임하기 전 대검 인권부장을 지낸 권 지검장은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과 상견례를 하면서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청년들이 형사처벌까지 받으면 전과가 누적돼 취업에 큰 타격을 받는다. 외려 처벌보다는 직업훈련을 통해 취업 기회를 주는 게 당사자나 사회에 더 이롭다”는 발상에서다.
 
검찰은 생계형 범죄자는 처벌 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또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전북 지역의 청년 취업률이 약 31%로 최근 10년 연속 전국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점도 검찰이 이 제도를 도입한 배경이 됐다.
 
모든 범죄자가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생계와 관련된 범죄를 저지른 만 18~34세가 주요 대상이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의시설 부정이용죄 등이 검찰이 고려하는 주된 범죄 유형이다. 우선 대상은 소득과 관계없이 무직·일용직이나 주 30시간 미만 상용직 근로자 등이다.
 
검찰은 초범이거나 동종 전과가 없고, 조사 과정에서 반성과 자활 의지를 보인 청년 위주로 제도를 시행할 예정이다. 사안에 따라 중·장년층에도 적용한다. 취업성공패키지는 1단계 상담·진단→2단계 직업 훈련(최장 6개월)→3단계 취업 알선 순으로 진행된다. 프로그램 이수자에게는 최대 715만원, 기업에는 연간 720만원이 지원된다.
 
전주지검에 따르면 지난달 말까지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은 모두 7명이다. 친구에게 본인 휴대전화와 은행 카드를 건네 인터넷 중고품 사기 판매에 쓰이게 한 혐의(사기방조)로 입건된 A군(19) 등이다. 대부분 취업 준비생이나 신용 불량자로 보이스피싱이나 인터넷 사기 등에 악용될 줄 알면서도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소액의 대가에도 통장·카드를 빌려줬다.
 
중년층 이상도 대상자에 포함됐다. 자동차 의무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차량을 운행한 혐의(자동차 손해배상보장법 위반)로 검찰 수사를 받은 B씨(60)가 대표적이다. 그는 사업 실패로 경제 사정이 나빠져 자동차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 안팎에서는 “대상자가 형사처벌을 면하기 위해 속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주지검은 제도를 악용하는 일이 없도록 주기적으로 참여자의 수업 태도나 상태 등을 점검할 예정이다. 또 교육 과정에서 부정이 발견되거나 이유 없이 중단할 경우 해당 참여자를 재기소해 더 무겁게 처벌할 방침이다.
 
최용훈 전주지검 차장검사는 “조건부 기소유예이므로 대상자들이 혜택만 받는 게 아니라 수개월간 취업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며 “대상자와 지역 사회 모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면 대검에 제도 확산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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