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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트럼프 비판한 피아니스트 "시민의 책임감 때문"

중앙일보 2019.11.19 17:09
이고르 레비트는 내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에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초청 받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다. [사진 소니클래시컬]

이고르 레비트는 내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에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초청 받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다. [사진 소니클래시컬]

 2016년 11월 9일 브뤼셀의 보자르 공연장. 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32)가 베토벤을 연주하기 전 청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안전 구역에 머무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경제력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편견이 심하며 기회주의자이고, 화가 나 있으며 위험한 사람이 어제 한 나라의 대통령, 최고 결정권자가 됐습니다.”
 

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 전화 인터뷰

2017년 7월의 런던 무대에서도 레비트는 대담했다. 런던의 대표적인 여름 축제 프롬스 첫 무대에서 연주한 후 베토벤 ‘환희의 송가’ 편곡 버전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왼쪽 가슴에는 작은 유럽연합(EU)국기 모양의 핀을 달고 있었다. 영국의 브렉시트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환희의 송가’는 EU의 공식 국가다.
 
무대 위 정치적 발언에 대해서는 당연히 찬반이 갈린다. 하지만 레비트의 베토벤 연주에 대해서만큼은 찬사 일색이다. 그는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주목받고 있다. 26세에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3곡을 소니 클래시컬에서 녹음해 영국 그라모폰지의 올해의 레코딩상을 받았다. 이어 2017년부터 2년동안 나머지 곡을 녹음해 지난 9월 베토벤 소나타 전곡(32곡) 앨범을 내놨다.  
 
발언은 정치적이고 연주는 신선한 레비트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한 피아니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달에는 독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1조원짜리’ 공연장 엘프 필하모니(함부르크)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고 있다. 내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페스티벌 오프닝에 선다. 내년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또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8번에 나눠 연주한다.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 [사진 중앙포토]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 [사진 중앙포토]

18일 전화 인터뷰에서 레비트는 “어떤 사람은 공연장이 정치 발언의 무대가 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날엔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무대에서 할 이야기를 종이에 써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 “음악가가 단지 음악만 한다면 자유롭게 음악을 할 수가 없다.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예술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비트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태계고 8세에 독일 하노버로 이주한 독일인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배척에 대해 관심이 많고 강한 어조로 반대를 표명한다. 얼마 전엔 독일의 방송사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해 증오와 차별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을 하고, 트위터를 자주 하는 이유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책임감 있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이 있다.” 그는 홈페이지 자기소개에 ‘시민, 유러피언, 피아니스트’라 써놨다. 몇년 전엔 슈피겔지의 칼럼니스트와 함께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의 난민촌에 들러 실태를 둘러보기도 했다. 레비트는 “요즘 내 관심사는 기후 변화, 그리고 거세지고 있는 인종 차별이다. 피아니스트로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민으로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는 있다”고 했다.
 
이고르 레비트. [사진 소니클래시컬]

이고르 레비트. [사진 소니클래시컬]

레비트의 베토벤 앨범 또한 정치적 발언만큼이나 분명하다. 소리는 담백하고 곡의 해석은 간결하다. 베토벤 소나타 모든 악장의 구조가 정확하게 전달되는 연주다. 그는 “베토벤은 급진적이고 자유로우며 혁명적인 작곡가였다. 동시에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고 했다. 또 “베토벤의 모든 소나타를 연주하고 녹음하면서 나 자신의 감정적 한계를 끝까지 밀어내야했다. 녹음을 끝내고 나니 나를 더 잘 알게 된 듯하다“고 덧붙였다.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피아노 작품들은 모두 녹음한 그는 “베토벤에 대한 다음 프로젝트도 당연히 구상 중”이라고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작품은 ‘장엄 미사’다. 레비트는 “한 장르를 모두 연주하거나, 서로 다른 곡들을 섞는 식으로 몇가지 아이디어가 있다”며 “하지만 당분간은 절대 비밀”이라며 웃었다. 소나타 전곡을 준비하고 이해하는 데에 몇년이 걸렸냐는 질문에는 “평생!”이라는 답을 내놨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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