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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당장 NSC 열어 지소미아 격론 붙여야

중앙일보 2019.11.19 00:13 종합 33면 지면보기
류제승 전 국방부 정책실장·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부원장

류제승 전 국방부 정책실장·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부원장

미국 국무부의 ‘한국 담당 4인방’이 최근 서울에 와 작심한 듯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유지를 공개 압박했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과 마크 밀러 합참의장도 지난 15일 한·미 안보협의회(SCM)는 물론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지소미아 유지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일본의 태도 변화가 있어야 지소미아 연장을 검토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한·일 문제이자 한·미 동맹 문제
반미·반일 감정으로 결정은 안 돼

만일 지소미아가 파기되고,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마저 파행한다면 동맹의 균열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게 되면 주한미군 감축 문제의 공론화로 비화할 가능성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이래 양국이 애지중지해온 안보 기제들이 줄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돈 시점에 한·미 동맹의 가치와 신뢰가 심판대에 오른 셈이다.
 
더욱이 북한은 연말까지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셈법을 바꾸지 않으면 내년 초부터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미국으로선 북한이 요구하는 대북 제재의 전면적 해제를 수용하기 어렵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레버리지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주한 미군 카드가 북한의 비핵화 행동을 견인하기에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누구보다 잘 안다. 북한 핵 문제의 진전은 그가 탄핵 국면을 돌파하고 내년 초부터 시작되는 재선 가도에서 이색적인 자랑거리가 될 게 틀림없다.
 
지난 8월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중지 결정은 지혜롭지 못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응할 카드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미국의 중재 역할을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을 압박해 일본의 전향적 조치를 유도하려던 계산은 빗나갔다.
 
일본의 경제 제재에 맞서 한국이 한·미·일 3국의 핵심 안보 기제인 지소미아를 도구로 삼은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미국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동맹국 한국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서운함도 깔려있다.
 
애당초 한국이 지소미아 파기를 강력히 예고하면서 일본과 비밀 정보 교류 중단을 선언하는 선행 조처를 했더라면, 일본의 태도와 미국의 중재 역할을 보면서 차후 전략을 구사하는 융통성을 가졌을 것이다. 한국 정부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런 전략적 판단조차 반미·반일 감정에 도취(陶醉·Euphoria)해 배척한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와중에도 한국은 지소미아의 전략적 가치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소미아는 한·일 문제이면서 한·미 동맹 문제다. 한·미 동맹의 협력적 안보는 한·미와 한·일 군사 정보를 공유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국 다음으로 북한 위협 정보를 제공할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어디에 있는가.
 
미국의 ‘린치핀(Linchpin)’ 한국과 미국의 ‘코너스톤(Cornerstone)’ 일본 사이에 비밀 소통이 단절되면 미군의 전략적 역할을 제약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불안정성이 생길 위험이 크다. 국가 안보를 책임진 위치에서 그동안 주고받은 정보량이 얼마냐는 산술적 근거만으로 유용성을 따진다면 한심한 일이다.
 
지소미아 종료 시한은 22일 자정이다. 지금이라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격론을 벌여야 한다. 그 결과가 의연하다면 국민은 참다운 극일(克日)의 시대에 들어선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내디뎠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다음에 일본이 취하는 태도를 보면 이웃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소미아 유지 카드는 미국의 무리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를 극복해야 하는 한국에 유리한 입지도 가져다줄 것이다.
 
류제승 전 국방부 정책실장·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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