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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속에서 미래의 '저커버그' 찾는다

중앙일보 2019.11.18 05:00 경제 5면 지면보기

탈북청년 10명 중 9명 창업 원해

탈북청년들의 창업을 위한 설문조사보고서. 자료:아산나눔재단,우리온

탈북청년들의 창업을 위한 설문조사보고서. 자료:아산나눔재단,우리온

87.7%. 아산나눔재단이 탈북청년단체 우리온과 공동으로 북한이탈주민 1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창업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다. 탈북청년 10명 중 9명이 한국에서 자신의 사업을 통해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업 교육을 받아봤냐는 질문엔 70.8%가 “전혀 받은 경험이 없다”고 답했다. 탈북민을 위한 창업 정책이나 제도에 대해 들어봤냐는 질문엔 역시 76.9%가 “모른다”고 답했다. 
아산나눔재단이 올해 처음으로 북한이탈주민 등 소외된 청년을 위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 ‘아산상회’를 시작한 것은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창업 수요는 넘쳐나지만 정작 창업할 방법을 모르는 탈북청년들에게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한국인과 외국인, 탈북민을 한팀으로 묶어 창업팀을 구성하려는 점이다. 국내 최초 시도다. 박지훈 아산나눔재단 사회변화교육팀 팀장은 “해외 나가면 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 사람끼리만 있으면 북한이탈주민이 냉대와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다”며 “글로벌한 환경에 노출해 아예 차별을 없애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 창업에 나서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 김상선 기자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 김상선 기자

탈북민·한국인·외국인 짝 이뤄 창업실험 '아산상회'

아산상회는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故) 정주영 회장의 호인 ‘아산(峨山)’과 정 회장이 처음 창업한 쌀가게 ‘경일상회’를 조합해 만든 명칭이다. 정주영 회장의 손녀딸인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는 “창업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기회이자 도구인데 북한이탈주민 등 소외된 계층에선 창업 기회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에게 기업가정신을 키워 차별 없는 창업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프로그램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원 코리아 엔터프레뉴어 나잇(One Korea Entrepreneur Night) 에서 '잇고잇고'팀이 프로젝트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아산나눔재단]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원 코리아 엔터프레뉴어 나잇(One Korea Entrepreneur Night) 에서 '잇고잇고'팀이 프로젝트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아산나눔재단]

 지난달 31일 찾은 서울 강남구 역삼로 팁스타운에서 열린 ‘아산상회’ 팀 프로젝트 중간발표회에선 창업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던 북한이탈청년들의 야심찬 사업구상 발표가 진지하게 진행됐다. 2년 전 한국에 온 북한이탈주민 온모(34)씨도 그 중 한명이다. 온씨는 5명의 멘토단과 다른 팀원 3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의 비즈니스 플랜은 북한이탈주민이 창업할 때 의논하고 지원해줄 수 있는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라며 자신이 속한 팀 ‘잇고잇고’의 사업구상을 설명했다. 그는 “한국에서 혼자 창업하려다 보니 네트워크도 부족하고 정보도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업을 생각하게 됐다”며 “장차 북한에서 문구 체인사업을 하는 게 꿈”이라고 설명했다. 
멘토로 참여한 협동조합경영연구소 송인창 소장은 “공동의 목표를 만들고 함께 해결하기로 한 것은 의미 있는 진전”이라며 “다만 단순히 모이기만 해선 협동이 될 수 없으니 보다 구체적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3국에서 아이 낳은 경험 창업에 반영 

지난 8월부터 시작해 두어 달간 창업 프로그램을 진행한 결과 총 10개의 팀이 구성됐다. 북한이탈주민들이 많은 만큼 사업 내용은 자신들의 경험을 녹여낸 아이템이 많았다. 북한이탈주민 2세대를 위한 통합 대안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준비 중인 위시스쿨이 대표적이다. 
아산상회에서 창업을 준비 중인 위시스쿨팀 참가자 박아영, 박영은, 김영란씨. 박민제 기자

아산상회에서 창업을 준비 중인 위시스쿨팀 참가자 박아영, 박영은, 김영란씨. 박민제 기자

팀원 중 한명인 북한이탈주민 주주(가명·39)는 제3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케이스다. 해외 체류 당시 출산한 딸을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이후 아이가 한국 사회에 적응을 잘 못 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위시스쿨은 제3국 출신 탈북 2세를 위한 사업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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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출신만 낼 수 있는 사업아이템 강점 

위시스쿨 팀원인 김영란(37) 씨는 “관련 통계에 따르면 탈북한 엄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북한이탈주민 2세는 2800명이 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중국어밖에 하지 못해 언어, 정체성 면에서 한국에서 큰 혼란을 느끼고 있다”며 “많은 학생이 적응하지 못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팀원인 박영은(23)씨는 “북한이탈주민 출신이 주축이 돼 심리적 사회적 멘토링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서 확장해나가는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원 코리아 엔터프레뉴어 나잇(One Korea Entrepreneur Night) 에서 아산상회 '비다늘'팀이 프로젝트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아산나눔재단]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원 코리아 엔터프레뉴어 나잇(One Korea Entrepreneur Night) 에서 아산상회 '비다늘'팀이 프로젝트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아산나눔재단]

북한이탈주민 참가자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북한 출신 어머니와 함께 15년 전 한국에 온 전영재(22)씨는 지역사회기반 유기농 농산물 유통 플랫폼을 만들려는 프로젝트 ‘12마일즈’, 수영 강사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만들려는 프로젝트 ‘스위미’에 팀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 씨는 어렸을 적부터 프로그램 개발을 공부했고 프리랜서로 웹사이트 제작일을 해왔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창업 교육을 수강했는데 대부분 비슷비슷했다”며 “아산상회는 북한이탈주민, 외국인이 함께 작업하다 보니 보다 열린 마음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고 팀 캐미(조합)도 더 좋은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목숨걸고 탈북, 기업가정신 잠재력" 

북한이탈주민 전영재(22)씨는 아산상회 창업팀 두곳에서 개발자로 활동하고 있다. 박민제 기자

북한이탈주민 전영재(22)씨는 아산상회 창업팀 두곳에서 개발자로 활동하고 있다. 박민제 기자

 다음 달 말 교육과정이 끝나면 내년 상반기에 창업에 나서도록 지원하는 게 아산상회의 1차적 목표다. 다른 창업지원프로그램과는 달리 창업자금 자체는 지원하진 않는다. 대신 본인 성장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육 과정은 무료이며 수료 후 투자자 연계를 지원한다. 
 박지훈 팀장은 “정주영 회장이 경일상회라는 쌀가게에서 시작해 현대그룹을 일궜던 것처럼 우리는 IT(정보기술)뿐만 아니라 일반 소상공인 사업에서도 글로벌 회사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이탈주민이 지금 당장은 창업 관련 아이템에 대한 감이 떨어지고 뒤처져 보일 수 있지만, 목숨을 걸고 탈북했던 이들이라 기업가 정신 잠재력 하나는 충분하다"며 "장점을 제대로 발휘한다면 스타트업의 요람인 판교테크노밸리를 주름잡는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교=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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