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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부 표현 변화로 '경기 바닥론' 고개…민간서는 “장기 저성장 우려”

중앙일보 2019.11.17 14:01
정부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가 경제진단에서 8개월 만에 ‘경기 부진’이란 단어를 빼면서 경기 바닥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민간 연구기관과 학계에서는 경기가 반등 신호가 나타나더라도 장기적인 저성장 국면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회복이라며 신중한 모습이다.
 
17일 기재부에 따르면 기재부는 매달 발표하는 ‘경제동향’(그린북)에서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 동안 ‘부진’이라는 단어를 활용해 우리 경기상황을 표현했다. 하지만 15일 발표한 11월호에서는 ‘부진’이라는 표현 대신 ‘성장 제약’이라는 단어를 새로 꺼내 들었다. 우리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일부 경제지표의 감소 폭이 줄거나 멈췄다는 것을 근거로 그 정도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순환변동치 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순환변동치 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설비 투자가 최근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광공업생산도 부침은 있지만 큰 틀에서는 플러스로 흘러가고 있다. 현재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와 향후 경기국면을 예고해 주는 ‘선행지수 순환변동치’가 상승·보합을 나타내기도 했다. 매달 최장 ‘마이너스’ 기록을 경신하던 과거와는 다른 흐름을 보인다는 것이다.
 
홍민석 기재부 경제분석과장은 “문구의 변화가 ‘경기가 바닥을 쳤다’거나 ‘수출·투자가 부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내년에는 글로벌 경기나 반도체 업황 등이 개선되면서 우리 경제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시각은 기재부가 최근 발간한 '한국경제 바로 알기'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기재부는 이 책자에서 “세계 경제 개선, 글로벌 반도체 업황 회복, 확장적 재정 등에 힘입어 내년은 올해보다 성장세가 개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해 국제통화기금(IMF)ㆍ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이 올해(2.0~2.1%)보다 내년(2.2~2.3%) 성장률이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도 경기 바닥론의 근거다.  
 
그러나 거시경제 전문가들은 내년 한국 경제가 올해보다 나아진다고 판단하는 데 선을 긋고 있다. 한국의 성장 동력인 수출이 12개월 연속 전년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는 가운데, 세금을 쏟아부은 정부 지출을 제외하면 경기를 끌어올릴 만한 요인을 찾기 힘들어서다. 과거 외환위기 수준은 아니지만, 실물경제 부진도 여전하다.
연도별 한국 경제성장률.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연도별 한국 경제성장률.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국내 경제학계 최대 학회인 한국경제학회의 이인실(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회장은 “2년 정도의 경기변동 주기를 감안해 타이밍상 경기 바닥론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며 “하지만 대외 불확실성이 워낙 큰 데다, 국내 경기가 개선된다는 뚜렷한 지표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년 성장률이 올해보다 다소 나아지더라도 이는 부진이 길어지면서 나타나는 기저효과 측면이 크기 때문에 (경기 바닥을) 섣불리 판단해선 곤란하다”라고 덧붙였다.
 
경기가 살아나더라도 경기저점을 찍은 후 서서히 반등하는 ‘U자형’보다 침체가 계속 이어지는 ‘L자형’에 가까운 흐름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대표적이다. 생산가능 인구 감소 추세에 따라 잠재성장률이 구조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일본처럼 ‘저성장·저물가’ 기조로 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KDI 수석연구위원과 통계청장을 지낸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정부가 재정확대를 통해 인위적으로 경기가 내려가는 것을 붙잡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라며 “장기적인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으로 경기 바닥을 언급하는 것은 이른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2005년 그린북 발간 이후 역대 최장 기간 ‘경기 부진’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에 부담을 느끼고 표현을 바꾼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대통령은 그린북 발표 하루 전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에 “경제리더십을 보여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실제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었다.
 
기재부는 그린북 인쇄본 내용 중 일부에 부진이란 표현이 포함된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수정하느라 그린북을 평소보다 늦게 배포했다. 이날 배포한 그린북 인쇄본에는 반도체 업황 ‘부진’이란 표현을 없애기 위해 ‘단가 인하’라고 수정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민간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정부에서 경기 바닥을 시사해 시장의 불안 심리를 잠재우려는 목적이 반영된 것 같다”라고 해석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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