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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일 뿐' 마음은 아직 청년이니까

중앙일보 2019.11.14 10:00

[더,오래] 조희경의 행복 더하기(17)

2019년은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던 한국이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 지 25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오랫동안 전 세계의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행사가 열렸다. 도움을 받던 국가사무소 시절부터 지금까지 25년 이상 후원해주신 분들이다.
 
부회장과 직원들이 준비하고 이사들과 후원자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진행된 행사였다. 내 역할은 당일 진행을 맡은 손범수, 진양혜 후원자를 케어 하는 일이었다. 행사진행팀 지시에 따라서 필요시, 사회를 맡으신 두 분과 소통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다. 원래 행사라는 게 항상 현장 변수라는 것이 있어서 시나리오대로 되는 적이 없는 만큼,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지시가 있을 때 순간대응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무대는 옆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 있다. 보통 출연자를 소개하고 공연이 진행될 동안 사회자는 이 곳에서 대기 한다. 그런데 이날은 두 분이 무대 아래에서 진행하게 되어, 계속 앞에 서 있거나 단상 뒤 의자에 잠시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사회자 옆에서 대기해야 하는 나도 본의 아니게 공연장 앞쪽에서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채 3시간을 서 있게 되었다.
 
다행히 경험 많은 두 분 후원자가 빠르게 진행한 덕에 자칫 길어질 수 있었던 행사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사람 된 후 처음 걷는 인어공주의 다리가 된 느낌이었다. 정말 온 몸이 다 아픈 것이 마음 같지 않았다.
 
 수십년간 후원하신 분들을 초청하여 감사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수십년간 후원하신 분들을 초청하여 감사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행사 다음날 한 팀장님이 “젊은 직원들도 많았는데 나이 50의 두 팀장님들이 종횡무진 뛰어다니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나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우스개 말을 듣고 완전 빵 터져 웃느라 눈물까지 흘렸다. 그래 그거였다. 행사를 리드하신 부회장께서 70대이시니 내가 스탭으로 뛰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직원들이 볼 때 나는 반백살인 것이다. 요즘 SNS 댓글에서 소위 꼰대라고 불리는 중년의 386세대, 기득권 뒤에 안주한다고 평가받는 사회학적 나이이다.
 
40세가 되던 해, 앞에 4자가 들어가는 그런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엄청 심난하고 조급했던 때가 있었다. 어느덧 앞에 5자가 들어가 앉은 나이가 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담담하다. 삼성에 계속 있었으면 무게 잡고 앉아 있을 나이인데, 승진도 연봉도 다 뒤로하고 호기롭게 비영리로 왔더니 행사장에서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일이 많았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대기업에서 보고서만 쓰고 살았던 내가, 늦은 밤까지 직원들과 행사장 셋팅하고 물품 나르고 청소하는 일이 어디 쉬웠을까. 단 하나, 어린이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는 미션이 나를 춤추게 했다.
 
더 많은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직을 했고 반백의 나이에도 여전히 뛸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그날 함께 한 모든 분들의 마음은 동일하리라. 지금도 마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열정도 많지만, 가끔씩 내가 사용하는 단어나 아이디어를 들을 때 스스로도 올드(old)해서 깜짝 놀라곤 한다.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경험에서 오는 인사이트와 ‘조건없이 주시는 후원금’을 어린이들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겠다는 마음만은 청년 못지않으니 어깨 펴고 오래된 광고 카피를 중얼거려본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전략기획팀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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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경 조희경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전략기획팀장 필진

[조희경의 행복 더하기] 최고급 아파트를 팔던 18년 차 마케터에서 NGO 신입생으로, 남 도우러 왔다가 내 마음 수련 중이다. 직장이 아닌 인생에서 멋지게 은퇴하고 싶어 선택한 길. 돈과 지식보다 진심 어린 마음이 더 위대한 일을 해낸단 걸 배우고 있다. 더 오래 사랑하며 살고 싶은 중년 아줌마의 고군분투 NGO 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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