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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DJ가 ‘청와대 정무수석실’을 없애려다 살린 이유

중앙일보 2019.11.12 00:37 종합 30면 지면보기
강민석 정치에디터

강민석 정치에디터

김대중(DJ)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1997년 말~98년 초) 얘기다. DJ는 서울 삼청동 당선자 집무실 외에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 스위트 룸을 사무실로 마련했다. DJ의 바로 옆방엔 ‘장성민팀’이 자리했다. DJ는 장성민 당선자 비서관에게  “IMF 상황과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정권이란 정체성에 맞게 비대한 청와대를 축소 개편하라”는 비밀지시를 내렸다. 이에 장성민은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엘리트 공무원 2명 및 경제부처에서 픽업해온 조원동(훗날 박근혜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 등과 함께 극비리에 청와대 조직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3박4일간의 합숙 끝에 11개 수석실을 8개로 줄이는 초안을 완성했다. 폐지될 수석실에는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들어 있었다. 개편안의 핵심이었다. 장성민은 DJ에게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고 한다.
 

장성민팀 폐지안 한 때 수용
김중권 비서실장 만류로 존속
‘좋은 정무’는 소통의 질에 달렸다

▶장성민=정무수석실은 청와대 명령을 집행하면서 입법부를 장악해온 박정희 시대의 유산입니다. 국민의 정부에선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DJ=자네가 그 생각을 어떻게 했지? 정무수석이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라는 것을. 나도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장성민=박정희 대통령 당시 청와대는 불과 39살인 유혁인 정무수석이 국회를 우지좌지하지 않았습니까. 백악관과 프랑스 엘리제궁,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총리 관저)까지 비교해봤는데 정무수석실은 우리만 두고 있습니다.
 
▶DJ=나도 장 동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이요. 그래도 최종 폐기하기 전에 앞으로 청와대 비서실을 책임질 김중권 실장(당시는 당선인 비서실장)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서 삼청동 사무실에 있던 김중권 실장이 스위스그랜드호텔로 달려왔다.
 
▶DJ=김 실장 생각은 어떠세요. 장 동지는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는데….
 
서소문 포럼 11/12

서소문 포럼 11/12

하지만 김 실장은 조심스러웠다. 그는 아직은 청와대에 정무적 기능이 필요하다면서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김 실장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다. DJ는 김 실장의 의견을 존중해 ‘일단’ 정무수석실을 존속시키기로 했다. DJ는 나중에도 없애지 않았다. 실제로 국정을 운영해보니 정무 영역이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만난 장성민 전 의원이 공개한 비화다. 강기정 정무수석이 국정감사 도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자를 쥔 손으로 야당 원내대표에게 삿대질하면서 고함을 지른 일이 화제가 되자 옛날 얘기가 나왔다.
 
사실 정무에는 ‘나쁜 정무’가 있고 ‘좋은 정무’가 있다. 음성적인 돈으로 야당 의원을 회유하거나 정치공작에 개입하고, 민원을 받아 정부 예산에 반영하는 등의 일이 나쁜 정무다. 정당 공천에 개입하려고 살생부를 만들거나, 문화부문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은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음습한 그림자가 일부 드리워져 있다고 정무수석실을 없앨 순 없다. 국민소통수석실이 말 그대로 국민과 소통하는 곳이라면, 정무수석실은 국회나 정당과 소통하는 곳이다. 소통을 없앨 순 없지 않은가. 패스트트랙 3법 같은 복잡한 현안에 타협의 마술을 발휘하는 것, 소위 ‘대통령 의중’이란 것을 쉬쉬하며 전달하고 다니는 것 말고, 의회 의견을 대통령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역방향 소통’, 이런건 ‘좋은 정무’ 아닐까.
 
그런데, 아무리 야당이 감정을 자극한다 해도, 정무수석이 국회에서 버럭해버리는 건 정무의 본질인 소통을 외면하는 행위다. 이미 수차 사과까지 했는데, 또 그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제 문재인 정부도 반환점을 돈 만큼 핵심 참모들이 자세를 추스를 필요가 있어서 해보는 소리다.
 
장성민 전 의원이 소통에 관해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때 언론에 비판을 받으면 해당 청와대 수석이 당장 춘추관에 내려갔다. ‘오늘 언론이 비판한 부분에 대한 대통령의 질타가 있었다. 사실 저희들이 준비를 못 해서 자료를 못 줬다.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다’라고 하곤 자료를 바로 냈다. 혹은 ‘오늘은 발표할 준비가 안 됐는데, 언론이 비판한 부분은 오늘 반드시 보강해서 내일 충분히 발표하겠다. 잘 봐달라’고 했다. 언론에든 야당에든, 이렇게 하는 게 소통 아닌가?”
 
실제로 그랬는지는 굳이 검증해보지 않았다. 사실인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일단 말 자체가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강민석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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