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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의미의 영역을 벗어나 누리는 쉼

중앙일보 2019.11.12 00:27 종합 32면 지면보기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구약성서에 ‘아케다(Akedah, 이삭의 희생)’라는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하나 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표현을 빌려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깡패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라고 ‘협박’하였고, 그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다는 짧은 이야기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몇몇 그림들을 비교해 보면 이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해석, 더 나아가 감상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
 

포스터가 그림이 될 수 없듯
구체적 메시지는 공감을 강요
음악은 의미가 유리된 추상세계
창의 경험하며 손상된 마음 치유

예를 들어 사르토(1486~1530)는 겁에 질린 어린 이삭을, 카라바조(1571~1610)는 두려움에 절규하는 이삭을, 카바로치(1587~1625) 는 체념하고 머리를 숙인 이삭을 그렸다. 희생의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한 가여운 아들 이삭과 고통을 억누르며 순종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반인륜적(?) 이야기를 가감 없이 서술하여 언뜻 신의 횡포를 고발하는 듯 보이는 이들과는 달리 피아체타(1682~1754)는 이삭과 아브라함을 근육질의 건장한 청년과 흰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으로 표현했다. 건장한 청년이 백 세를 훌쩍 넘긴 아버지를 힘으로 제압하지 못할 리 없기에 감상자는 아브라함이 아닌 이삭의 순종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천사가 팔을 낚아채 아브라함이 칼을 놓치는 장면을 포착한 렘브란트(1606~1669)의 그림에서는 아름다운 청년 이삭을 살리고자 다급하게 외치는 신의 목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샤갈(1887~1985)은 이 이야기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만큼 철저히 소외된, 하지만 가장 가슴 아팠을 이삭의 어머니 사라가 저 멀리에서 흐느끼는 모습을 담는 세심함과 따뜻함을 보인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병치시킴으로써 이 두 사건에 공통으로 담긴 ‘희생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라는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구상예술은 이렇게 구체적 내용을 함축하여 구현한다.
 
예술가들의 앙가주망은 이렇게 구체적 대상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작품에 투영함으로써, 즉 예술적으로 포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양식을 달리한 쌍둥이 그림처럼 보이는 고야(1746~1828)의 ‘마드리드에서의 1808년 5월 3일’과 피카소(1881~1973)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보며, 펜데레츠키(1933~)의 ‘히로시마의 희생자를 위한 애가(哀歌)’와 쇤베르크(1874~1951)의 ‘바르샤바의 생존자로부터’를 들으며 우리는 공히 학살이라는 참상에 대하여 분노하고 아픔을 공유하며 애도하게 된다. “매우 세련된 예술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을 결합하는 도덕적 이상을 담아내지 못하면 그것은 기껏 오락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예술은 삶에 지친 사람들이 일시적 기분전환을 할 때 필요할 따름”이라는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술은 이렇게 구체적인 메시지를 함축할 때에 비로소 가치가 부여된다.
 
반면 니체는 칸트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만일 음악의 여신이 소리가 아니라 말(언어)이었더라면 사람들은 귀를 막았을 것”이라는 다소 과격한 언급은 음악이 구체적인 그 무엇을 전달하지 않기에 그가 기꺼이 음악에 귀를 열었다는 말이 된다.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 시절 한 달이 멀다고 포스터를 그리고 표어를 지었다. 그 아련한 추억은 ‘쥐를 잡고, 공산당을 타도하고, 불을 조심하라’는 명령을 아직도 수반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메시지는 감상자에게 획일화된 정보를 전달하고 나아가 공감하고 따를 것을 강요한다. 그래서 표어는 시가 될 수 없고 포스터는 그림이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고 했다. 음악의 어떤 속성을 동경한다고 한 것일까? 음악은 음(音)의 조직적 배열, 즉 소리로 쌓은 순수한 음향구조물로서 가사를 수반하지 않는 한 구체적으로 그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추상화 앞에서 난감해지고 음악을 들으며 조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상이다. 오감을 통해 전달되는 모든 정보의 구체적 의미를 파악하고 해석하여 대응하는 것이 몸에 배었기에 의미의 세계로부터 유리된 추상적 대상에서 감흥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음악은 의미의 전달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언어가 아니다. 의미의 영역으로부터 철저히 유리된 추상적 세계다. 그로 인해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각기 다른 느낌을 받고 다른 것을 발견하며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창의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하루 한 번쯤, 아니 일주일에 한 번쯤 의미의 영역을 벗어나 보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지친 몸을 치유하듯이 추상적 대상은 의미에 지치고 손상된 마음을 치유한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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