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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살리기 재 뿌렸다” 선발권 제한에 농어촌 자율고 울분

중앙일보 2019.11.12 00:04 종합 20면 지면보기
“느닷없이 지역 모집으로 바꾸라는 건 학교를 포기하란 말이나 다름 없다.”  
 

교육부, 거창고·한일고 등 49곳
전국단위 학생 모집 특례 폐지
학교 “모집 정원 어떻게 채우나”
전문가 “지역 교육 거점 없어져”

경남 남해군의 남해해성고 강억구 교장은 11일 ‘농어촌 자율학교’의 전국 모집 특례를 폐지하겠다는 교육부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앞서 7일 교육부는 자사고·외고·국제고 79곳을 2025년 일반고로 일괄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남해해성고처럼 다른 시·도 학생도 뽑을 수 있던 지역 일반고의 전국 모집 특례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전국서 학생 선발하는 일반고 49개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전국서 학생 선발하는 일반고 49개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1972년 경남 남해군에 설립된 남해해성고는 한때 학생 수 감소로 폐교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2004년 자율학교 지정 이후 재단과 교사의 노력으로 ‘사교육 없는 학교’이면서도 ‘SKY(서울·고려·연세대)’ 등 진학 학생이 많은 학교로 변신했다. 매년 신입생 92명 중 74명을 전국 모집으로, 18명은 남해군 출신으로 선발한다.
 
강 교장은 “남해군엔 일반고가 세 곳이 더 있는데, 이들의 정원만 합해도 남해군 전체 중학생보다 많다”며 “남해군에서도 교통이 좋지 않은 우리 학교는 지금껏 전국 모집으로 학생을 채울 수 있었는데, 정부가 상의 한번 없이 결정하니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한숨 쉬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부정 의혹을 계기로 급물살을 탄 ‘고교서열화 해소’ 정책의 불똥이 도시 학생이 찾아오는 학교로 인정 받던 지역 일반고에 튀었다. 교육부가 전국 모집 특례를 폐지하기로 한 농어촌 자율학교는 전국 49곳에 이른다.
 
대부분 비평준화 지역의 일반고로, 강원도의 양양고, 경남 거창고·남해해성고·함양고, 경북 풍산고, 전북 익산고, 충남 공주사대부고·한일고, 충북 중원고·보은고 등이 대표적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자사고·특목고를 폐지해도 이들 학교의 학생 선발권을 유지하면 또 다른 서열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모집 특례 폐지의 배경을 설명했다.
 
수도권 집중화와 학생 감소 속에서 학교를 살리기 위해 특색 있는 교육과정, 기숙사 등 교육환경의 조성에 노력했던 학교들은 교육부의 방침에 반발하고 있다. 8인 1실 전교생 기숙사, 주·야간을 아우르는 교육활동으로 유명한 충남 공주의 한일고는 신입생 140명 중 30%는 충남에서, 70%는 다른 시·도에서 선발한다. 신일수 교장은 “인구 감소로 충남 지역 모집 정원은 매년 미달하고 있다. 충남 학생으론 정원을 채울 방법이 없는데 정부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경남 거창고의 박종원 교장도 “정부가 정책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1953년 개교한 거창고는 인성교육과 수준별 학습지도 등을 통해 자율학교의 성공모델로 꼽혀, 매년 40여 개 이상의 학교와 단체가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온다. 박 교장은 “정부 논리대로 시골에 있는 학교에는 시골 아이만 다녀야 한다면, 서울대는 서울 학생만 가야 하냐”며 “서울 학생이 내려와 공부할 수 있고, 지방 학생이 서울로 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 사회에서도 “지역 살리기에 재를 뿌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충남공주시의회 이창선 부의장은 “지역 내 한일고와 공주사대부고는 전국적인 명문고로, 지역 사회의 위상을 높이고 지역 경제에도 기여하고 있는데, 지역 발전의 동력 중 하나를 잃게 됐다”고 우려했다. 경남 거창에서 부동산중개소를 17년째 운영하는 천진례(66)씨는 “청년은 대부분 대도시로 떠나고 노인만 남는 상황에서 그나마 거창고를 통해 도시 학생이 오고 부모도 이사오곤 했는데 이마저 사라질 것 같다”고 걱정했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거창고·한일고·공주사대부고와 같은 학교는 지역의 교육 거점 역할을 했는데, 이들까지 평준화하면 지역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며 “교육부의 정책 선회는 지방자치의 정신, 지역 살리기라는 정책 기조 모두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박형수 기자, 공주·거창=김방현·이은지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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