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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시대의 문제와 싸우지 않는 대법원이 무슨 ‘최고 법원’인가

중앙일보 2019.11.11 00:29 종합 26면 지면보기

김명수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재판

‘다른 사람 정자로 인공수정해 낳은 자식도 법적으로 친자식이다.’ 지난달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가장 큰 쟁점은 남편이 동의해 인공수정으로 낳은 첫째 자녀가 아니었다. 부인이 혼외 관계로 낳은 둘째 자녀였다.
 

대법관 의견 다양해졌지만
법 기술적인 문제에만 치중
사회적 가치 놓고 맞붙을 때
이슈 토론의 중심 될 수 있어

“아내가 혼인 중 임신해 출산한 자녀라면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남편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더라도 여전히 남편의 자녀로 추정된다.”  
 
대법원은 대법관 9명의 다수의견으로 남편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에 대해 권순일·노정희·김상환 대법관은 별개의견을, 민유숙 대법관은 반대의견을 냈다.  
 
“검사 기술의 발달로 사생활 침해 논란 없이 낮은 비용과 놀라운 정확도로 과학적 친자 감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거(同居)의 결여’만을 판단 지표로 삼는 것은….”(민 대법관의 반대의견 중)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가사 사건 전문인 엄경천 변호사는 “반대되는 객관적 증거(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오면 추정은 당연히 깨져야 한다”면서 “불륜의 피해자인 남편에게 계속 법적인 친부 역할을 하면서 양육비까지 내라는 다수의견은 상식에 어긋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판사는 “자녀의 안정적 지위 보장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서도 “1958년 민법이 제정된 당시부터 있던 규정에 현실을 욱여넣은 느낌”이라고 했다.
  
특징 1: 의견 다양화 속 ‘전원일치’ 급감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대법원장·대법관 9명의 얼굴이 바뀌었다. 이른바 ‘서오남(서울대 출신·50대·남성)’의 틀을 깨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우리법연구회(김명수·박정화·노정희)와 민변(김선수) 출신이 대법원에 입성했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추세는 분명하다. 대법관들이 모두 같은 의견을 내는 전원일치 판결 수가 크게 줄었다. 양승태 대법원장 때는 전원합의체 판결 116건 중 33.6%(39건)를 전원일치로 판결했다.(법률신문) 2017년 9월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지난달 23일까지 나온 전원합의체 판결 42건을 분석해봤다. 전원일치 판결은 11.9%(5건)였다.
 
특히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의 힘겨루기가 팽팽해지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 들어 대법관 4~6명이 소수의견에 가담한 사건은 61.9%로 양승태 대법원(35.3%)의 두 배 가까이에 이른다. 배상원 대법원 재판연구관은 “전원합의체 토론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징 2: 토론하되 설득하지 않는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전원합의체 판결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수의견, 별개의견, 반대의견에 보충의견들까지 붙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11월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이 대표적이다. 1인 별개의견, 4인 반대의견, 다수의견에 대한 제1보충의견, 제2보충의견, 반대의견에 대한 제1보충의견, 제2보충의견…. 이렇게 흩어진 의견들에 김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 12명 전원이 이름을 올렸다.
 
대법원 내부에선 “충분히 토론하되 끝까지 설득하진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A란 논리와 A″란 논리가 있을 때 굳이 A′로 절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인적 구성이 다양해지면서 거리감이 생긴 영향이 커 보인다. 양승태 대법원장 때의 강제징용 등 재판이 논란이 된데 따른 반작용도 있다.
 
일단 긍정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 때의 획일화된 경향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결코 작지 않은 변화”라고 했다. 반면 “법적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판사 출신 변호사 K씨는 “전원합의체 판결이 한번 나오면 10년은 가야 하는데, 대법관 두세 명만 바뀌면 판례가 바뀔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특징 3: ‘보팅 그룹’이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의 특징은 다수의견·소수의견이 갈리고 있음에도 대법관들이 성향별로 뭉치는 이른바 ‘보팅 그룹(voting group)’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 사건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곤 한다. 진보 성향의 ‘독수리 5남매’가 보수 성향 대법관들과 전선(戰線)을 형성했던 이용훈 대법원장 때와 다른 점이다. 그 이유는 전원합의체에서 다루는 사건들의 성격에 있다.  
 
부당이득 반환, 부동산 이중매매, 학원 등록, 시효 중단, 소송기록 접수 통지, 불능 미수, 경합범….
 
강제징용이나 양심적 병역거부, 국정원 댓글 사건 같은 일부를 빼면 법리 해석이나 소송 요건을 다투는 사건이 대부분이다. 사회적 가치와 관련된 사건 자체가 많지 않다. 그나마 강제징용 판결은 대법원에서 5년이나 묵혔던 것이고,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 역시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의 ‘대체복무제 도입’ 결정을 서둘러 뒤따라간 측면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 8월 국정농단 사건 판결을 주목하는 법조인이 많았다. 정작 15쪽 분량의 박근혜 전 대통령 판결문엔 안종범 업무수첩 등 상고이유에 대한 법률 판단만 담겨 있었다. “절차적 문제로 다시 고등법원으로 내려보낸다는 특수성이 있었다고 해도, 그래도 대통령 범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인데…”(모 로펌 대표)라는 반응이 나온다.  
 
최서원(최순실)씨 판결과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판결의 경우 다수의견, 별개의견, 반대의견으로 갈렸지만, 보충의견은 없었다. 반대의견이 나오면 으레 다수의견 대법관들 쪽에서 반대의견을 반박하는 보충의견을 내왔다는 점에서 ‘작지만 확실한 파격’이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판결문의 토씨 하나가 논란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사건에서 세분된 의견을 내는 것은 곤란하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사회적 가치와 담론을 갖고 논쟁해야
 
대법원이 ‘이슈 토론의 장(場)’이 되려면 전원합의에 올리는 사건을 엄선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보다 소부에서 합의하지 못한 사건이 많이 올라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실제로 다수의견, 소수의견이 나뉜 전원합의체 판결 37건을 분석해보니 주심 대법관이 소수의견 쪽에 선 경우가 20건으로 더 많았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부동산 명의신탁에 대해 전합(전원합의체)을 한다고 해서 기존 판례가 변경되나 관심을 갖고 봤는데 9대4로 기존 판례를 유지하고 끝났어요. 전합이 대법관 개개인의 소신을 밝히고 끝나는 자리가 돼서야….”  
 
한 전직 대법관은 “전원합의체는 법 기술적인 해석보다 사회적 가치와 담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건을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이용훈 대법원 때는 전원합의체 재판장인 대법원장이 중요 사건을 1, 2심 단계부터 주시하고 있다가 대법원에 오면 전원합의에 올리도록 했다. 또 ‘독수리 5남매’ 대법관들이 사회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전원합의에 올렸다.
  
대법관들의 실력을 보고 싶다
 
전원합의체에서 많은 사건을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사건을 제대로 토론하는 게 더 중요하다. 대법관들은 법률 지식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맞붙어야 한다. 서로 인격을 존중해 주라고 국민이 대법관 권한을 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법관들의 실력을 보고 싶다. 사회적 불공정부터 강제수사, 무리한 기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소수자 문제까지 다뤄야 할 이슈는 차고 넘친다. 대법원이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고뇌가 담긴 판결을 내놓지 않으면 상고심 개혁도 힘을 얻을 수 없다. 시대의 문제와 싸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최고 법원’(헌법 제101조 2항)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일러두기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모두 참여하는 재판이다. 대법관 4명이 하는 소부(小部) 재판과 구분된다.
  
다수의견·소수의견=다수의견은 과반수(13명 중 7명 이상)의 대법관이 가담한 의견으로 대법원을 대표하는 의견(법정의견)이 된다. 반대의견은 다수의견과 결론이 다른 것이고, 별개의견은 결론은 같지만, 이유가 다른 것이다. 반대의견·별개의견을 소수의견이라고 한다.
  
독수리 5남매=이용훈 대법원장 재임 당시(2005~2011년) 대법원에서 진보적인 의견을 냈던 김영란·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 대법관을 가리킨다. 이들은 논쟁을 통해 상당수 사건에서 판례 변화를 이끌어냈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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