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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의 시선] DLF 사태에서 그래도 희망을 보는 이유

중앙일보 2019.11.11 00:18 종합 32면 지면보기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은행권이 해외금리 연계형 파생결합펀드(DLF) 때문에 난리다. 하나은행과 우리은행 등 일부 은행권에서 판매한 잔액 6723억원(지난달 25일 기준) 중 86%(5784억원)가 손실구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만기까지 남은 기간 중 일부 손실을 만회한다고 해도 추가로 52.3%(3513억원)의 손실이 예상되는 암담한 상황이다.
 

키코 등 우르르 몰려다니던 은행
DLF 사태에선 빠진 곳도 많아
고객 우선하는 경영 자리 잡길

이 상품을 판매한 은행들의 잘못은 분명하다. ‘만기상환 100%, 원금손실 0%’ ‘짧은 만기, 높은 수익률’ 같은 문구를 앞세워 80대 이상의 고령 고객에게까지 상품을 무차별 판매했다. 손실이 나더라도 그것은 고객 몫이고 우리는 수수료만 챙기면 된다는 심보였던 것이다. 이들 상품의 수수료는 6개월 1%, 연 2% 수준으로 일반적인 수수료보다 높았다. 기대수익만큼 위험도 따라 커지는 펀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들은 수익만 알리고 위험은 무시했다.
 
무리수도 서슴지 않았다. 하나은행은 DLF에 들어가는 7개의 기초자산을 따로따로 상품위원회에 올려 통과시켰다. 기초자산의 구성에 따라 상품이 완전히 달라지는 데도 고객이 먹을 비빔밥이 아니라 그 재료들만 검사하고 만 것이다. 우리은행은 지난 3월 상품위원회를 열면서 일부 위원이 평가표 작성을 거부하자 아예 ‘찬성’ 의견으로 조작해 승인했다. 또 구두로 반대의견을 표명한 위원을 상품담당자와 친분이 있는 직원으로 바꿔 찬성의견을 받아냈다. 이런 과정에 고객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오로지 ‘우리가 팔고 싶은 상품은 판다’는 실적주의만 활개 쳤을 뿐이다.
 
항상 고객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실적을 올리라는 경영진의 압박이 우선이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사고가 난 은행들을 검사해보니 책임자가 대부분 금융판매 실적으로 승진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은행권의 암담한 수준을 재확인시켰다. 그때그때 팔릴 만한 상품으로 몰려다니는 수준 낮은 ‘떼거리 영업’의 현주소도 알려줬다. 방카슈랑스나 키코 사태의 악몽이 되풀이된 듯하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한가지 있다. 이번 사태를 피해 나간 곳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다. KB 국민은행은 하나·우리은행과 정반대 상품을 팔았다. 독일 국채 금리가 떨어지면 오히려 수익이 나는 상품이었다. 여기엔 은행과 증권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원펌(one firm)’ 전략이 크게 작용했다. 은행 따로, 증권 따로가 아니라 고객의 입장에서 좋은 상품인지를 따지는 시스템이다.
 
윤종규 회장과 허인 행장이 강조하는 이 전략은 은행 사람들이 은행의 수익이 아니라 고객의 수익을 우선시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래서 DLF라는 이상한 상품이 나타났을 때 WM본부에서 리스크 관리와 소비자 보호 담당자들이 자신 있게 ‘이 상품은 문제가 많다’고 말하고 상급자들이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신한도 마찬가지다. 신한은 지난해부터 이 상품을 팔아왔다. 하지만 올 초 담당자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독일 국채 등 기초자산의 가격이 바뀌었는데도 팔던 DLF는 똑같았던 것이다. 그는 비상벨을 울렸고 은행은 이에 적절히 반응했다.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다. 은행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위험을 경고하고 예방하는 시스템은 은행마다 다 갖춰져 있다. 상품위원회나 리스크 관리위원회 같은 것들이다. 상품이 들어오면 담당자가 리뷰하고 리스크 관리 등 다른 파트에서 교차 점검한다. 그리고 상품위원회에서 최종판단을 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스템은 DLF에선 은행마다 다르게 작동했다. 고객의 수익이라는 원칙과 경영진의 실적 독려 사이에서 원칙을 지킨 곳과 아닌 곳들이 있었다. 경영진의 눈을 의식해 침묵한 곳과 자신의 할 일을 제대로 한 곳이 갈렸다.
 
DLF 사태의 결과는 한국 금융에 또 다른 상처로 남았다.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품을 고객에게 마구 팔아치운 은행들의 수준은 아무리 질타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의 사태에 비해 달라진 점도 분명히 있다. 고객의 입장에서 손실을 예방하고 금융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은행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앞으로의 고객 선택에 영향을 주고 고객 보호에 제 몫을 다한 은행들이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면 DLF사태는 상처로만 남진 않을 것이다. 은행이 고객의 신뢰를 얻고 금융회사로서의 본업을 충실히 한다면 정부가 그토록 외쳐온 금융시장 선진화나 한국의 금융 허브화도 앞당겨질 수있다.  
 
DLF사태의 잔해 속에서 한국 금융이 다시 태어날 희망을 찾는 이유다.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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