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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색 콘테이너와 보따리 트럭…중세 유럽 도시를 장식하다

중앙선데이 2019.11.09 00:21 660호 18면 지면보기
프랑스 푸아티에 생루이 예배당에 설치된 김수자의 ‘이주하는 보따리 트럭’.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문소영]

프랑스 푸아티에 생루이 예배당에 설치된 김수자의 ‘이주하는 보따리 트럭’.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문소영]

장엄한 고딕 대성당 앞에 커다란 오방색 줄무늬 컨테이너가 들어섰다. 작은 예배당의 석관 부조 앞에는 검정 보따리가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중세 아키텐 공국의 중심지였고 20세기 철학 거성 미셸 푸코의 고향인 프랑스 중부 도시 푸아티에(Poitiers) 곳곳에 한국적 느낌의 물건들이 있는 것은 왜일까.
 

‘트라베르세’ 축제 첫 주인공 김수자
작가와 친구들 작품으로 도시 장식
보따리·바느질로 경계 넘나들기
수보드 굽타는 인도 거리음식 시연

뿐만 아니다. 대표적인 중세 유적과 거리 곳곳에는 색동 보자기 같은 스펙트럼이 그려진 표지판이 서있다. 2020년 1월 19일까지 도시 전체에서 열리는 예술축제를 알리는 표식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축제 명칭이 ‘트라베르세/김수자(Traversées / Kimsooja)’라는 것. 세계적 명성을 지닌 한국 미술가 김수자(62)의 이름이 축제 명칭에 들어있는 것이다.
 
‘경계 넘기’ 표방한 축제 주제 완벽 소화
 
오귀스탕 예배당의 회랑에 설치된 김수자의 ‘호흡’.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문소영]

오귀스탕 예배당의 회랑에 설치된 김수자의 ‘호흡’.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문소영]

오방색 컨테이너와 검은 보따리는 ‘보따리 작가’라는 별명을 지닌 김수자의 최신작이다. 컨테이너는 작가가 20년간 살아온 뉴욕 아파트를 최근 떠나며 꺼내온 모든 물건이 담긴, 유랑민의 거대한 색동 보따리라 할 수 있다. 제목도 그에 맞춘 ‘보따리 1999-2019’다.
 
작가는 풀었다 묶었다 할 수 있는 보자기, 천 안팎을 넘나드는 바느질, 창문 안팎을 통과하는 빛을 모티프 삼아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민 같은 개인적·인류적 문제부터 음과 양, 물질과 비물질 같은 우주적 이원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형이상학적 문제까지 다양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가로지름’ ‘경계 넘기’라는 뜻의 ‘트라베르세’가 제 1회 작가로 김수자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터다.
 
‘트라베르세’는 여느 비엔날레와 달리, 한 명의 예술가를 선정해 그가 자신의 작품과 그가 고른 다른 작가들의 작품으로 도시 전체에 걸쳐 설치하게 함으로써 고색창연한 도시에 생기와 변화를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의 영광을 김 작가가 차지하게 되었고, 그의 초대를 받은 인도의 수보드 굽타, 일본의 타다시 카와마타, 콩고의 새미 발로지 같은 세계적 미술가들이 합류했다.
 
지난달 12일 축제 오프닝에서 만난 김수자 작가는 이 신선한 큐레이팅이 최근 파리의 주요 미술관 중 하나인 팔레드도쿄의 새 관장으로 부임한 엠마 라빈의 아이디어였다고 알려주었다. 라빈과 푸아티에 출신의 미술사학자 엠마뉘엘 드 몽가종이 ‘트라베르세’의 공동 큐레이터다.
 
김수자 작가

김수자 작가

“푸아티에는 중세 때 유럽 정치의 중심이었지만, 그 후 한동안 잠든 듯한 도시였습니다. ‘트라베르세’는 도시의 문을 다시 세계를 향해 여는 시도죠. 거기 부응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캔버스로 삼고, 도시 곳곳의 장소적 특성을 염두에 두며 바느질하듯 서로 엮고, 이를 세계 곳곳과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트라베르세’라는 개념은 바로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작품으로 탐구해온 것이기도 하고요.”
 
작가는 퍼포먼스·비디오·사진·조각·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루면서도 경계와 그 넘나듦에 대한 관심을 한결같이 추구해 왔다.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린 1997년작 퍼포먼스 영상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 2727km’ 역시 이주에 대한 것이었다. 작가는 알록달록한 보따리를 가득 쌓아 올린 트럭에 올라타 11일 동안 한국의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인도의 거리 음식을 요리하고 있는 수보드 굽타.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문소영]

인도의 거리 음식을 요리하고 있는 수보드 굽타.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문소영]

10년 후 프랑스 미술관의 의뢰로 다시 보따리 트럭을 타고 파리의 이민자 관련 장소들을 떠돈 ‘이주하는 보따리 트럭’(2007)이 이번 ‘트라베르세’에 나왔다. 라빈과 드 몽가중의 설명대로, “안식처에서 쫓겨난 영원한 떠돌이”의 알레고리로서 보따리 트럭을 타고 끝없이 달리는 작가의 뒷모습이 생루이 예배당의 회벽에 영사된다.
 
그리고 바로 그 트럭이 예배당 한가운데 우아한 아치형 제단을 향해 우뚝 서있다. 저항적으로 돌진하는 듯하기도 하고, 큐레이터들 말처럼 “감정 이입과 평화로운 공존을 호소하는” 듯하기도 하다. 이곳은 종교적 배타성의 장소였을 수도 있고, 반대로 소외된 유랑민들의 마지막 피난처였을 수도 있으니까. 이처럼 작품은 옛 가톨릭 예배당이라는 새로운 맥락을 만나 더 큰 울림을 얻었다. 알랭 클레이 푸아티에 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수자 작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인 이주 문제를 말하고자 합니다. 이 축제를 통해 푸아티에의 풍부한 과거 유산과 현대미술 사이에 멋진 관계가 구축되길 바랍니다.”
 
오귀스탱 예배당의 회랑과 생트 라드공드 교회 지하묘지에는 김수자의 ‘호흡’이 설치돼 있다. 아치형 유리 창문들에 덮인 반투명 회절격자필름이 창을 투과하는 햇빛을 벽과 바닥에 끝없이 변하는 무지갯빛 도형들로 변신시킨다. 작가의 말대로 공간 전체가 “숨 쉬는 색동 보따리”처럼 되도록 말이다. 라빈 관장은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이 공간의 끊임없는 변화를 감지하며 오래도록 머물고 명상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문화유산과 현대미술을 엮다
 
아키텐 공국 궁전 입구에 설치된 타다시 카와마타의 작품.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문소영]

아키텐 공국 궁전 입구에 설치된 타다시 카와마타의 작품.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문소영]

이번 ‘트라베르세’에는 김수자와 함께 새로운 감각적 경험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작가들이 여럿 참가했다. 미국의 스티브 비텔로는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된 기독교 건축 중 하나라는 푸아티에 성 요한 세례당에 신비로운 사운드 아트를 설치해 세례당이 지어진 4세기보다도 더 아득한 태고로 돌아가는 느낌을 선사했다. 한국의 가객 정마리가 생트 라드공드 교회에서 무반주로 우리 전통 성악 정가(正歌)를 불렀을 때, 그 청아하고 오래 울리는 소리는 성당의 궁륭 속을 천상의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개막식에서 수보드 굽타의 ‘쿠킹 더 월드’는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멀리 인도의 거리 음식을 유럽인들에게 선보였다.  작가 특유의 인도산 금속 식기 설치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서 말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학자인 샤를 말라무드의 동명의 책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인도 음식이 어떻게 생일·결혼·장례 같은 인생사의 주요 의식에서 의미를 지니고 사람을 연결하는지에 대한 책이었죠. 그걸 보고 나도 음식으로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원래 요리하길 좋아하고, 또 20년 넘게 식기로 작품을 해왔으니까요.”
 
하이라이트는 아키텐 공국 궁전에 설치된 김수자의 관객 참여 설치 작품 ‘마음의 기하학’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완전한 구체가 아닌 찰흙 공의 다양한 형태가 참여자들 양손의 대칭적 힘과 탁자에 작용하는 중력 외에 참여자들의 마음까지 대변한다. 널찍한 타원형 나무탁자에 빙 둘러앉아 열심히 찰흙을 손 안에 굴려 구체를 만드는 아이와 어른들을 보며 작가는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의 마음 속 자취를 탁자에 남기고 가세요. 그 마음들이 모여 새로운 우주가 형성될 겁니다.”
 
드 몽가종 큐레이터는 “이번 행사는 상징적으로 푸아티에의 열쇠를 한 예술가에게 넘겨주는 것”이라며 “예술가의 힘을 빌어 도시의 오랜 기억이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트라베르세’의 작품들은 이렇게 경계를 넘어 프랑스와 세계를 엮고, 과거의 문화유산과 현대미술의 미래 비전을 엮고, 공간과 사람을 엮고, 사람과 사람을 엮고 있다.
 
푸아티에(프랑스)=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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