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66년 망통 비엔날레서 깜짝 1등
당시 초대작가엔 천하의 피카소
50년대 44세에 늦깎이 파리 유학
반건축적 데콜라주 조형기법 창안
반지하 방서 빵·치즈로 버티기도
유학 온 아들과 함께 작업·식사
파리 떠나는 김환기에게 ‘사생결단’ 약속
![1976년 화실에서 작업 중인 남관 화백. [사진 남관 유족]](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11/09/96f4cf5f-c39b-4148-94de-5e8a49b938de.jpg)
1976년 화실에서 작업 중인 남관 화백. [사진 남관 유족]
도불전에서 팔린 그림값을 지인에게 맡겨 매달 50달러씩 파리로 송금하게 했다. 돈을 맡은 사람은 그 돈을 자신의 사업자금으로 날려 버렸다. 또 다른 지원의 약속도 있었는데 다 끊겼다.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생활의 방도를 찾는 데 시간과 정열을 사용하는 대신 죽든 살든 그림만을 그리기로 했다. 파리 도착 직후 아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구입한 캔버스와 물감을 아낌없이 작품제작에 다 쓰기로 했다.
몽파르나스의 셋집은 반지하였다. 우기인 겨울이 되면 습기로 온 집안이 흥건했다. 아침에 벽에 손을 대 보면 물이 주르르 흘렀다. 침대 밑에도 물이 괴어 있었다. 벽돌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캔버스를 세워야만 그림의 손상을 막을 수가 있었다.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그림을 그렸다. 커피 한잔의 시간도 아까워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했다.
그런 가운데 1959년, 3년여의 파리생활을 청산한 김환기(1913~1974)가 파리를 떠나기 전날 몽파르나스 남관의 화실로 찾아왔다. 파리 화단의 냉정한 현실 속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귀향하는 김환기의 표정은 우울했다. 자신은 비록 파리를 떠나지만 남관만큼은 끝까지 파리에 남아서 뼈를 묻어 주기를 원했다. 남관은 파리에서 작품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사생결단의 다짐을 약속했다.
![‘정(靜)과 대화’, 캔버스에 유채, 1978년, 73x115.[사진 남관 유족]](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911/09/8761445e-b189-4c4b-b2b8-04abffaf9038.jpg)
‘정(靜)과 대화’, 캔버스에 유채, 1978년, 73x115.[사진 남관 유족]
1966년은 즐거운 일이 많은 한 해였다. 무엇보다 망통 현대회화 비엔날레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파리 정부에서 제공하는 18구의 오르도네의 작업실에 입주할 수가 있었다. 예술인을 위한 작업실 전용 아파트였다. 5층의 꼭대기 층은 사실상 복층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층들에 비해 층고가 2배나 높고 채광이 좋아 대작을 제작하기에 그만이었다. 어떤 예술가들은 부분적으로 복층으로 개조하여 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혔던 습기로부터 해방돼 좋았다.
남관은 음식을 타박하는 체질은 아니었다. 치즈 말고는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없이 입맛이 무덤덤한 편이었다. 파리에 가서는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기에 싸구려 빵과 치즈로 버텼다. 그의 건강을 지켜 준 건 우족 곰탕, 소꼬리 곰탕이었다. 다행히 프랑스 사람들에게 소뼈를 고아서 먹는 문화가 없었다. 그 덕에 가격이 매우 쌌다. 남관은 우족이나 소꼬리를 사다가 푹 고아서 곰탕을 만들어 며칠이고 먹었다. 작업실은 파리의 원조 소꼬리 곰탕집을 방불케 했지만 작품제작을 위해선 음식을 만드는 시간을 아껴야 했기에 식단이 부실했고 영양공급이 불균형적이었다.
시간의 층 한 겹씩 벗겨 내듯 동양적 사유
1968년 남관은 서울로 돌아온다. 10년 가까이 홍익대 교수로 지냈다. 부암동에 작업실을 차렸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파리의 작업실로 돌아가 작업했다.
1979년에는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한 아들 윤이 파리로 유학을 왔다. 부자간에 오르도네의 작업실을 함께 쓰게 됐다.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의 동거가 시작됐다.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 남윤(1952~ )은 요리하기를 좋아했다. 매일 저녁 국적불명의 창작요리가 등장했다. 아들은 생선, 닭, 소시송 등 요리재료를 구하러 시장을 다녔다. 작업실에 오랜만에 생활감각의 활기가 넘쳤다.
저녁상 앞에서는 부자지간의 대화가 펼쳐진다. 남관은 술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반주로 와인을 조금 마실 뿐이었다. 대신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말이 대화지 미술계 상황에 관한 일방적인 의견의 개진이나 교육에 더 가깝기 마련이었다. 남관은 아들과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다. 그만큼 아들 앞에서 할 말도 많았을 터이다. 얼마 후 남관은 근처의 아파트에 방을 따로 하나 얻어 나가면서 낮에만 작업실을 사용했다. 밤에는 아들이 와서 작업실을 사용하고 잠을 잤다. 다행히도 저녁식사는 부자가 함께했다. 나중에는 남윤도 15구의 파리고등응용미술학교 근처의 아파트로 집을 구해 나갔다. 두 사람은 주말에 작업실에서 만나는 걸로 묵계가 이루어졌다.
1985년 평창동에 작업실 겸 살림집을 지었다. 2층 높이의 층고를 확보한 큰 작업실이 마련됐다. 1990년 봄이 되자 남관은 기관지염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병세가 갑자기 악화됐다. 먼저 간 김환기의 모습이 자꾸 남관의 눈앞에 나타났다. 남관은 몇 번이고 환기를 부르다 숨을 멈추었다. 그 응답일까. 20년 후 환기미술관에서 남관의 탄생 100주기전이 열렸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