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 정모시공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건너는 돌다리 뒤로 자동차 도로가 있다. 이 물길이 끝나는 절벽이 정방폭포다. 서귀포는 곳곳에 동네 사람만 아는 비경을 숨겨놓고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는 공원의 도시
정방·천지연 등 폭포 위에도 공원
포구마을 애환과 사연 서려 있어
남영호, 4·3사건 등 비극의 현장도
책은 어릴 적 추억을 담은 여느 고향 이야기처럼 포근하다. 숫기없는 소녀 ‘맹숙이’의 일기를 들춰보는 것 같다. 이를테면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 돌아간 인민군 탈영병 아버지의 사연은 서 이사장이 처음 털어놓은 가족사다. 하나 여행기자의 눈길이 멈춘 건, 전 세계를 걷고 다니는 여자 서명숙이 들려주는 제 고향의 공원 자랑이었다.
서명숙 이사장과 서귀포의 시크릿 가든을 찾아다녔다. 책에 나오는 공원 5개를 걸어서 돌아봤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방향으로 서귀포 도심을 한 바퀴 돌며 구석구석의 공원을 탐방했다. 3시간이 넘게 걸렸고, 거리는 10㎞를 웃돌았다.
서귀포부터 말해야겠다. 지금의 서귀포는 제주도의 절반이다. 서귀포시는 백록담 남쪽을 아우르는 행정지명이다. 애초의 서귀포는 달랐다. 소녀 맹숙이의 서귀포는 남(南)으로 난 작은 포구마을이었다. 왼쪽으로는 삼매봉 아래 외돌개에서 오른쪽으로는 소남머리 지나 정방폭포까지가 서귀포 사람이 기억하는 본래의 서귀포다. 소녀 맹숙이에게도 이 바깥은 다른 세상이었다.

서귀포항. 본래의 서귀포는 연근해 어선만 드나드는 작은 항구다. 멀리 바다 위로 섶섬이 보인다.
칠십리시공원에서 내려오면 아담한 포구마을이 나타난다. 이 항구가 서귀포다. 너무 작아서 서귀포라는 이름이 되레 어색하다. 서명숙은 연근해 어선만 들고 나는 선착장에 앉아 옛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귀포에도 ‘세월호 사건’이 있었어. 1970년 12월 10일 부산으로 떠난 남영호가 여수 앞바다에서 침몰했어. 그때 323명이 못 돌아왔어. 내 친구 해란이 엄마는 그 배를 탔고, 우리 엄마는 탈 뻔했다가 안 탔고. 남영호가 바로 여기에서 나갔어. 지금도 생생해.”
제주도는 비극의 섬이다. 절경마다 눈물이 배어 있다. 맹숙이가 친구들과 멱감던 자구리공원을 지나면 소남머리다. 정방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이 해안절벽에서 수백 명이 처형당했다. 4·3사건 때 벌어졌던 참극이다.
서복불로초공원에서 옆길로 샜다. 자동차 달리는 다리 아래로 수로가 이어졌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왜가리 노니는 개울 양옆으로 수풀이 우거졌다. 말 그대로 시크릿 가든이었다. 서귀포의 다른 공원들은 스쳐 지나가기라도 했는데, 이 비경은 처음이었다. 서 이사장이 “정모시공원이야. 책에서 뺄까 잠깐 고민했던 나만의 아지트”라고 말했다.
서귀포 여자 서명숙이 “서귀포를 아시느냐?” 물어왔다. 제법 안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서귀포 구석구석에 들어앉은 공원을 돌아다니다 이 비밀 같은 도시에서는 길을 잃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제주=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