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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돌봄 갈등’마저 사라질 세대가 온다

중앙일보 2019.11.07 00:08 종합 28면 지면보기
강혜란 대중문화팀 차장

강혜란 대중문화팀 차장

요즘 중앙일보·JTBC는 수습기자 채용 절차 중이다. 일반적으로 전형 1단계는 이력서 외 작문 형태의 자기소개서다. 지난해 주제는 ‘자신의 부음 기사를 쓰시오’였다. 당시 전형위원으로서 수백여 명의 작문을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남자는 적지 않은 숫자가 ‘유족으로 아내와 1남 1녀가 있다’ 등 희망 가족관계를 밝혔다. 반면 여자는 가족, 특히 자녀 여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도 여럿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1990년대생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1.6명 안팎일 때 태어났다. 대부분 한두 자녀 출신으로 진학·입사 과정에서 공식적인 성차별은 거의 없는 세대다. 그런데도 일·가정 양립에 관한 의식 혹은 무의식은 남녀가 달랐다. 지난해 최종 합격자 15명을 샘플로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커리어 설계에서 가족이 걸림돌인 양 생략돼 있었다.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한국인 합계출산율. 그래픽=신재민 기자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한국인 합계출산율. 그래픽=신재민 기자

요즘 화제몰이 중인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은 1녀를 뒀다. 언니는 독신이다. 이들의 어머니 오미숙이 2녀 1남을 낳은 데 비해 생애 출산율이 현저히 낮다. 여공 출신인 오미숙은 성차별·저학력 탓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세대다. 게다가 개발성장기 한국 사회는 오미숙이 ‘집사람’으로서 남편을 뒷바라지한다는 전제하에 굴러왔다. 현재도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2052시간, 2016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길다.
 
90년대생 여성은 남성과 동일 교육을 받고 취직한다. 성장 활력이 떨어진 한국 사회에서 결혼 후 맞벌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문제는 우리 기업 근로 체계가 여전히 개발성장기 남성 가장을 표준 모델로 하고 있단 점이다. 김지영은 “저도 팀장님처럼 잘할 수 있습니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에겐 ‘집사람’이 없다. 남녀가 경쟁 속에 살인 근로에 내몰리는 한 90년대생의 생애주기에서 저출산은 생존 전략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0.98명)이 보여준다.
 
작문 관련해 덧붙일 게 있다. 실은 응시자 다수는 부음기사에 유족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스타일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들이 ‘혼생’(혼자 생활)을 예비하는 징후일 수 있다.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가구특별추계’에 따르면 2017년 전체 가구에서 31.4%를 차지했던 부부+자녀 가구 비중은 30년 후 16.3%로 감소한다. 이미 큰 비중인 1인 가구는 28.5%에서 37.3%로 대폭 증가한다. 『수축사회』 저자 홍성국씨가 지적한바 “모든 개체는 서식환경이 나빠지면 그 숫자를 줄이고 위험을 경계한다”. 김지영의 ‘돌봄 갈등’마저 옛이야기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강혜란 대중문화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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