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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 빼돌려 영화관 갔던 그때, 공부 즐거움 알았다면…

중앙일보 2019.11.06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13)

자식 가진 부모들의 가슴 졸이는 날, 수능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근처에 있는 몇몇 절 입구엔 수능합격기원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수능 때만 되면 되풀이되던 남편의 부러움 섞인 푸념이 생각난다.
 
옛날엔 중학교도 시험을 치고 들어갔다. 중학 입학시험에 장학생으로 추천된 남편은 아침에 학교에 가려 하니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경산에서 대구까지 나가야 하는 교통사정이라 차비를 받아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도시락이었다. 보릿고개를 넘어가던 시절, 아침에도 쌀이 없어 누른 국수를 삶아 먹었는데 도시락은 언감생심이었다.
 
자식 가진 부모들이 가슴 졸이게 되는 수능 날이 다가왔다. 수능 때만 되면 되풀이되던 남편의 부러움 섞인 푸념이 생각난다. [중앙포토]

자식 가진 부모들이 가슴 졸이게 되는 수능 날이 다가왔다. 수능 때만 되면 되풀이되던 남편의 부러움 섞인 푸념이 생각난다. [중앙포토]

 
자식이 장학생으로 선발된들 학교에 보낼 수 없는 가난함을 어찌 말로 설명하겠는가. 어른들은 아픈 가슴을 안고 모두 새벽에 밭으로 나가 버리신 거다. 훗날 조모님과 어머니의 말씀 중에 새벽부터 밭에 나가 호미질을 하시면서 많이도 울었단다.
 
남편은 사춘기적 아픈 상처를 단단한 딱지가 되도록 안고 살았다. 화가 날 때면 그 상처를 긁어댔다. 자식 공부도 못 시킬 형편이면 왜 낳아서 고생시키냐고 대들기도 했단다.
 
나도 고등학교를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외삼촌 가족과 할머니가 이민을 떠나기 전 학교로 찾아오셨다. 졸업반인 나에게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동생들을 바라지 하라고 내 손을 잡고 부탁하셨다. 이후 마지막 등록금을 빼돌려 영화관으로 유흥지로 쏘다니며 다 써버리고 진학 못 하는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러 다녔다.
 
아버지는 내가 외할머니 핑계로 등록금을 다 탕진하고 다닌 걸 알면서도 아무 말 안 하셨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기보다 스스로 다른 길을 가보며 자발적인 내 선택을 기다리신 것이다. 아버지 생각이 맞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힘들고 지친 어느 날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는 남편같이 대들며 따지진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학교에 못 가고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마치 부모 때문인 양 슬쩍 흘려 말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전혀 미안한 마음 없이 무심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었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갔겠지.” 남의 핑계를 대지 말라는 한마디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훗날, 사춘기 상처로 마음의 흉터가 큰 남편에게 써먹은 말이기도 하다. “당신이 꼭 가려고 했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갔어야지. 부모 원망은 핑계라고….”
 
다음 해 나는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가 있는 큰 회사로 들어갔다. 낮에는 작업복을 입고 저녁이 되면 교복을 갈아입었다. 꾸벅꾸벅 졸던 낮의 힘듦도 사라지고 달려서 학교로 갔다. 모두 환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가 걸상에 앉으면 금세 병아리 약 먹은 듯 또 졸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눈꺼풀이란 걸 그때 알았다.
 
이것저것 다 배우고 싶어도 몸이 안 따라주고 눈도 침침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아쉽기만 하다. 꿈을 설계하고 나를 위한 공부를 하다 보면 지금의 힘듦도 훗날엔 재산이 될 것이다. [사진 pixabay]

이것저것 다 배우고 싶어도 몸이 안 따라주고 눈도 침침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아쉽기만 하다. 꿈을 설계하고 나를 위한 공부를 하다 보면 지금의 힘듦도 훗날엔 재산이 될 것이다. [사진 pixabay]

 
나이가 들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배울 것이 무진장 많다. 이것저것 다 배우고 싶어도 몸이 안 따라주고 눈도 침침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아쉽기만 하다. 그러니 부모들이 밀어주고 끌어줄 때, 머리가 팡팡 돌아갈 때, 할 수 있는 배움의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꿈을 설계하고 나를 위한 공부를 하다 보면 지금의 힘듦도 훗날엔 재산이 될 것이다.

 
다음 주에 수능을 보는 아이의 부모가 모임에 모인 사람들에게 떡을 돌린다. 유명한 ‘순흥기지떡’을 ‘수능기지떡’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떡을 돌리며 자식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의미다. 지금, 엄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자식을 향한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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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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