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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의 시시각각] 일본형 장기불황이 시작됐다

중앙일보 2019.11.06 00:42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지금 우리 국민은 정부의 정책 책임자들이 양치기 소년일 수 있다는 의심을 잠시라도 거두면 안 된다. 한국 경제가 자유낙하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지표가 온통 빨간불인데도 “우리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현 정부의 상황 인식은 세월호에 아이들이 갇혀 있는데도 “가만히 있으라”라고 한 것과 똑같을 수 있다.
 

일본처럼 한국 냄비 속 개구리 신세
정부는 세월호처럼 “괜찮다” 반복
비상벨 울릴 때 위기 대응에 나서야

왜 그런지는 숫자를 보면 안다. 가장 심각한 징후는 올해 들어 계속 비상벨을 울리고 있는 물가다.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두 달 만에 마이너스를 벗어났지만 여전히 0%를 기록했다. “디플레이션 조짐 아니냐”는 우려에 정부는 “일시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도 정부는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국민을 속였다.
 
정부 말만 믿다가 국민은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국난을 겪어야 했다. 대기업과 거대 은행이 줄줄이 문 닫고 실업자 200만명이 쏟아졌다. 그때 “경제가 위태롭다”며 정부가 미리 대처했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이 삿대질하면서 발끈할지 모르겠지만, 정부가 아무리 우겨도 0%대 물가는 한국 경제를 향한 중대한 경고가 맞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경제 현장에서는 이미 일본형 장기불황이 시작됐다. 사실 그 징후는 ‘폭탄세일’ ‘점포 정리’ 같은 표현 속에서 일상화한 지 한참 됐다. 최근 저물가는 그 결과일 뿐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더 뚜렷해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가입 예정국 40개국의 9월 물가상승률에서 한국은 최저(-0.4%)를 기록했다. 우리가 입만 열면 ‘잃어버린 20년의 저주를 받았다’고 긍휼히 여기는 일본에도 없는 일이다. 일본 물가상승률은 올해 0.2~0.9%를 오가고 있다. 적어도 물가가 뒷걸음질 치는 일은 없다는 얘기다.
 
물가 상승률 꼴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긍정적 의미의 물가 안정이 아니라 경제 역동성의 저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물가는 저금리·저성장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요즘 은행에 돈 1억원을 맡겨도 한 달 이자가 10만원 조금 넘는다. 그러니 돈을 쓰지 못하고 소비가 위축된다. 저금리의 저주다. 무엇보다 잠재성장률이 2%대 중반으로 떨어진 건 암담하다. 올해는 그나마 달성하지 못해 1%대 실질성장률이 예고돼 있다. 이 모두 현 정부 들어와서 벌어진 일이다. 모든 나라가 똑같은 조건에서 유독 한국만 마이너스 물가와 급격한 잠재성장률 저하가 나타나는 건 한국 경제 내부의 구조적 문제가 원인이라고 봐야 한다.
 
정부는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일각에서 디플레이션을 우려하지만 물가가 장기간 지속해서 광범위하게 하락하는 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연말이나 내년 초 1%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미국 대공황과 일본 거품붕괴 때처럼 저물가는 경기침체를 알리는 사이렌이라는 사실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비상벨이 요란스럽게 울리는데도 정책 책임자들이 양치기 소년처럼 계속 “괜찮다”고 하는 동안 한국 경제가 손도 쓰지 못하고 냄비 속 개구리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물가가 광범위하게 하락하지 않고 1%대로 돌아오면 괜찮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저성장·저물가 자체로 경기침체의 수렁에 빠져들고 결국 일본의 전철을 밟아 장기 불황의 그림자가 덮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진단이 틀리니 올바른 대책이 나올 수 없다. 경제 활력을 죽이는 소득주도성장이 계속될 뿐이다. 그럴수록 소비와 투자가 계속 위축되고 물가를 끌어내리는 디플레이션이 가속될 수 있다. 대출을 끼고 아파트를 산 사람도 많으니 부채 디플레이션까지 겹치게 된다. 경제의 총체적 붕괴를 의미한다. 그래도 정부는 “괜찮다”고 고장 난 레코드를 틀 가능성이 크다. 국민만 냄비 속 개구리 신세다.
 
김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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