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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안된다” “불가능하다”…24살 창업자에게 쏟아진 악담

중앙일보 2019.11.05 00:15 종합 26면 지면보기

스타트업 데뷔무대인 ‘디캠프’ 데모데이 가보니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의 10월 디데이(스타트업 데모데이) 첫 발표자인 엑싱크(xSync) 송보근 대표가 다른 참가자들(가운데)과 심사위원들이 듣는 가운데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사진 디캠프]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의 10월 디데이(스타트업 데모데이) 첫 발표자인 엑싱크(xSync) 송보근 대표가 다른 참가자들(가운데)과 심사위원들이 듣는 가운데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사진 디캠프]

벌써 7년째,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 저녁이면 200여 명이 꽉 들어찬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 6층 다목적홀은 축제 분위기다. 1차 심사를 거쳐 투자와 디캠프 입주 기회를 잡은 스타트업 창업가들의 데뷔 무대가 열리는 디데이(데모데이)는 지금껏 환호와 웃음이 넘치는 응원과 격려의 자리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10월 행사만큼은 달랐다.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급기야 2시간 넘게 진행된 데모데이가 끝난 후 시상자로 나선 김홍일 디캠프 센터장은 이날 발표한 5명의 20~30대 창업자들이 모여앉은 자리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정중하게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위선적 한국 닮은 창업 생태계
입으론 혁신 실제론 구태 만연
조언 빌미 도전의지 꺾는 투자자
규제 못잖은 ‘꼰대’라는 걸림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디데이는 딱 지금의 대한민국 같았다. 앞에선 온갖 미사여구로 혁신을 추켜세우지만 현장에선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무장한 ‘꼰대’들이 혁신의 싹부터 꺾는 그런 현실 말이다. 어쩌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있어, 아니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상다반사 해프닝에 불과한 이날 일을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파트너로 나선 10월 디데이는 내년 신사업펀드 조성을 준비 중인 중견기업과의 연결을 내세워서인지 유례없이 경쟁이 치열했다. 20대 1의 경쟁을 뚫고 본선에 오른 5개 벤처기업 대표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평소처럼 딱 5분.
 
가장 먼저 무대에 선 사람은 이벤트 운영관리 플랫폼을 제공하는 엑싱크(xSync) 송보근 대표였다. 5분이 지나자 발표 중인데도 마이크가 꺼졌다. 그리고 벤처 캐피탈리스트(VC)와 사모펀드(PE) 등 다양한 분야 심사위원 5명의 질의응답 10분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단 10분 안에 5명의 심사위원들이 돌아가며 5분 스피치 때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과 한계를 끄집어내야 하는데 본인의 역할을 망각한 일부 심사위원들이 “내가 누구”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심지어 전혀 엉뚱한 사업 제안에 이르기까지 질문 아닌 설명과 자기 자랑으로 시간 대부분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약과였다. 이날 최악의 심사는 두 번째로 오른 인공지능 사고예측 에어백 개발 기업 제이온가드(J·ON GAURD) 이희창 대표 발표 때 나왔다. 24살인 이 대표는 AI로 사고를 예측해 운전석이 아닌 차량 바깥에서 에어백이 터지는 기술을 발전시켜 지난 7월 회사를 설립했다. 고교 시절 안전밸트를 매지 않고 택시를 탔다가 무면허 차량에 뒤를 받쳐 머리가 앞 유리창을 뚫고 나가는 큰 사고를 당한 경험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냈다.
 
행사 후 김홍일 센터장(사진 가운데)은 심사를 문제 삼으며 참가자들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를 했다. [사진 유튜브 캡처]

행사 후 김홍일 센터장(사진 가운데)은 심사를 문제 삼으며 참가자들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를 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심사위원들은 좋은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질문 대신 선입견을 바탕으로 한 지적, 아니 질타가 이어졌다. 가령 파트너원인베스트먼트 최재혁 대표는 “너희 팀에는 1차 벤더에서 일했던 사람도, 기계공학자도 없지 않느냐”며 “(자동차 회사 납품은) 작은 회사가 할 수 없다, 1차 벤더들이나 하는 거지 매출 500억, 1000억 원 하는 회사도 불가능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심지어 “이 팀은 R&D(연구개발)만 하다 끝날 것 같다, 지금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이 현실에 있다, 너무 먼 미래 얘기”라며 2분 넘게 도가 지나친 조언을 했다.
 
초기 창업자를 도와주는 업무를 오래 했다는 플랜H벤처스 원한경 대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납품이 어려운지 얘기해 주겠다”며 “자동차는 프로젝트 단위가 큰 데다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수백억, 1000억 원대 납품업체가 즐비한 상황이라 (이런 기술을) 혁신이니까 받아들이라고 했다가 실패하면 (자동차 회사) 실무자들한테 부담이 된다”고 했다. 한발 더 나아가 “이게 진짜 필요할 것 같았으면 기존의 자동차 회사들이 이미 다 개발을 끝내고 쓰는 데가 있지 않았겠느냐”며 “그런 부분을 잘 생각해서 시장을 먼저 보고 개발을 시작하라”고 했다. 원 대표 발언 역시 중간에 이 대표의 짧은 답변을 제외하고도 2분이 훌쩍 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훠궈 매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권민재 대표가 만든 알바 관리 시스템 알바체크, 전압이 각기 다른 충전기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프리 전압 충전기를 만드는 명선휘 대표의 라이칸(LYCAN). 그리고 기존 숙박시설에 새 콘텐트를 입혀 밀레니얼 여행자를 모으는 베드 라디오(BED RADIO) 김지윤 대표 발표 때도 엇나간 심사가 쏟아졌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면 방어하는 답변이라도 할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안 된다”는 지적만 받으니 작은 스타트업 대표 입장에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자리는 실제 투자의향이 있는 투자자와의 개별 미팅이 아닌 데뷔전 성격이 강한 데모데이 아닌가. J·ON 가드 이 대표는 “그동안 상도 많이 받는 등 나름 기술에 자부심이 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회사 이미지가 망가지니 그 순간엔 멘탈이 깨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또 “투자를 빌미로 비싼 역삼동 일식집 데려가서 밥값 내라는 사기꾼도 만난 적이 있어 안전한 공모전에 많이 도전하는데 다른 자리에서도 ‘너희는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뭔가 익숙한 장면이다. 지난 2004년 삼성전자는 “개발자 2000명을 투입한 우리가 고작 8명짜리 회사의 운영체제에 왜 관심을 갖겠느냐”며 제 발로 찾아온 안드로이드라는 보석을 차버렸고, 결국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삼켜 모바일 세상을 호령하게 됐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이젠 대기업은 물론 정부, 심지어 보수적인 금융권까지 너나없이 스타트업 육성과 혁신을 말하지만 현실에선 이렇게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J·ON 가드가 안드로이드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만큼 성장할지 이름 없이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다소 무모해 보여도 도전에 박수 쳐주고 격려하기보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당장의 규모와 부족한 자본만 보고 혁신적 아이디어를 무시하는 습성이 여전하다는 얘기다. 이런 논리라면 SK텔레콤이라는 막강한 자본을 등에 업은 휴대전화 SMS(단문서비스)가 있던 시절 카카오톡의 도전은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인 셈이다. 세상은 지금 페이스북이 아니라 싸이월드 세상이었어야 하고 말이다.
 
김지윤·명선휘·권민재·이희창·송보근 대표(왼쪽부터). [사진 디캠프]

김지윤·명선휘·권민재·이희창·송보근 대표(왼쪽부터). [사진 디캠프]

“우리는 스타트업 여러분들을 도와주는 사람도, 지원기관도 아니라 여러분들과 함께 응원하는 사람들”이라며 “심사위원 분들께 질문을 요구하는 것이지 의견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라는 김홍일 센터장의 사과와 이례적인 쓴소리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정재호 고려대 경영대학 산학협력중점교수는 “의견을 내는 자리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자리인데 일부 심사위원들이 심사와 멘토링을 구분을 못 해 벌어진 일”이라며 “시작은 다들 그렇게 초라하게 하는 건데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투자자가 적지 않다”고 했다.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이 폭넓은 투자자로 확대되면서 불거진 부작용이다.
 
이날 심사를 한 플랜H벤처스 원 대표에게 그날 심사에 대해 물었다. 그는 “옆에 앉은 심사위원이 공격적으로 나오니 분위기에 휩쓸려 과했다”며 “끝나고 보니 얼굴이 화끈거려 참가한 대표들에게 따로 사과했다”고 했다. 원 대표는 다만 “발표한 스타트업이 이렇게 초기 단계인 줄 몰랐고 주최 측이 그런 부분에 대해 미리 충분한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그게 부족하다 보니 기획 의도와 엇나갔다”고 덧붙였다. 김 센터장은 “비단 이날 디데이 얘기가 아니라 스타트업계엔 나이를 앞세워 창업자들에게 함부로 조언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나이가 아니라 축적된 경험과 열정을 높게 봐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1조7000억 원을 쏟아붓는 인공지능(AI) 육성 비전을 담아 “규제 없는 AI 정부”를 선언한 바로 그 날(10월 28일) 검찰이 “AI기술을 가장 많이 적용하는 기업”(‘타다’ 모회사 쏘카 이재웅 대표)이라는 모빌리티 회사 경영진을 기소하는 나라다. 부처 간 엇박자만큼이나 돈만 쏟아부으면 벤처가, 또 AI가 성장한다고 믿는 물정모르는 이 나라에선 정부 규제만 걸림돌이 아니었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암초들도 이렇게 곳곳에서 혁신을 죽이고 있었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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