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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 아들과 70대 노모, 누구 앞의 삶이 더 절실할까

중앙일보 2019.11.04 09:00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32)

중환자실에 40세 환자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심장을 막으면 신장이 멈췄고, 신장을 막으면 폐가 멈췄다. 겨우 고비를 넘어서도 곧 더 큰 능선이 나타나길 벌써 3일째. 머리맡의 모니터는 24시간 쉬지 않고 경보를 울렸다. 그야말로 중환자실에 어울리는 환자였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렇게 몸이 망가진 걸까?'
환자는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거센 풍랑의 한복판. 시술 하나 하는 것도 약물 하나 쓰는 것도 평소보다 몇 배는 어려웠다. 한 걸음만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 장기적인 치료계획은 사치였다. 그저 번갈아 손을 돌려 당장의 구멍을 막아내기도 바빴다. 그렇게 눈앞의 위기를 처리하고 있노라니, 어느새 온몸의 장기를 기계가 몽땅 대신하고 있었다.
 
어려운 환자일수록 보호자의 전폭적인 지지가 중요하다.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중에 결과를 두고 책임을 물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일면 의사는 중요한 순간에 멈칫거리게 된다. [사진 pxhere]

어려운 환자일수록 보호자의 전폭적인 지지가 중요하다.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중에 결과를 두고 책임을 물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일면 의사는 중요한 순간에 멈칫거리게 된다. [사진 pxhere]

 
"교수님, 보호자가 치료를 그만 포기하고 싶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소식이다. 어려운 환자일수록 보호자의 전폭적인 지지가 중요하다. 치료 난도가 높아 중간에 실패가 잦기 때문이다. 때론 도박적인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당연히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모험할 용기가 난다. 나중에 결과를 두고 책임을 물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일면 중요한 순간에 멈칫거리게 된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는, 찰나의 망설임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끝난 게 아니잖아! 아직 가능성이 있잖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왜 그만둬? 잘못 들은 거 아냐? 어미가 자식을 포기한다는 게 말이 돼? 자식은 어미를 포기해도 어미는 자식을 포기할 리가 없어! 할머니 좀 여기로 불러봐. 내가 얘기해볼게"
 
그렇게 노인은 내 앞에 앉았다. 그녀는 이야기에 앞서 한 방울 눈물을 먼저 떨구었다. 폭력이 있었고 상실이 있었다. 원망이 있었고 체념도 있었다. 한 여자의 장구한 인생 드라마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기실 영화에서 흔히 보던 신파 스토리와 차이가 없었다. 누구나 들어봄 직한 흔한 얘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날것이었다. 영화가 아닌 현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중압감에 짓눌렸다. 침 한번 삼킬 수 없었다.
 
"이 아이가 이렇게 된 후 저는 평생을 병 수발로 보냈죠. 단 한 순간도 내 삶은 없었어요. 솔직히 말할게요. 이번에 살려낸다고 해서 얘가 가진 병이 다 낫는 건 아니잖아요? 이렇게 병원 생활만 반복하다 언젠간 죽을 거잖아요? 그런 삶이 이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죠?"
 
할머니는 이제 본인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하셨다. 아이를 위해서 사는 걸 그만두고 싶단다. 거기에 대고 환자의 생명은 대체 어쩔거냐는 물음은 도저히 입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사진 pixabay]

할머니는 이제 본인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하셨다. 아이를 위해서 사는 걸 그만두고 싶단다. 거기에 대고 환자의 생명은 대체 어쩔거냐는 물음은 도저히 입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사진 pixabay]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저도 제 삶을 살고 싶어요. 이제라도요."
 
억척같이 살아온 삶의 무게를 이미 들었기에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를 위해서 사는 걸 그만두고 싶단다. 자기 삶을 살겠단다. 그래서 최근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동네에서 하는 문화 교실도 다닌단다. 하루하루가 충만하다고 했다. 거기에 대고 환자의 생명은 대체 어쩔 거냐는 물음은 도저히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등을 돌려 떠났고, 환자 곁엔 의사만 남았다.
 
사람의 목숨값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목숨값을 매길 수는 없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많은 목숨을 지켜보면서 내가 알게 된 건, 세상에는 내가 예단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연이 있다는 것뿐이다. 누구도 자기 생명의 가치를 남의 손에 평가받길 원하지 않는다. 설령 그게 의사일지라도.
 
응급실 원칙은 하나뿐이다. 하나라도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순번대로 손을 돌린다. 감히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다. 여명이 얼마 없건, 극악무도한 살인마건. 무엇도 개의치 않고 위급한 환자부터 살릴 따름이다. 여전히 나는 70대 할머니의 남은 인생과 40대 와병 환자의 목숨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저 눈앞에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판단을 사회에 돌릴 뿐이다. 의사는 정의를 실현하는 직업은 아니니까.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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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 조용수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필진

[조용수의 코드 클리어] 의사는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지켜본다. 삶과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는 특히 그렇다. 10년 가까이, 셀 수 없이 많은 환자의 생과 사의 현장을 함께 했다. 각양각색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이제는 죽음이 삶이 완성이란 말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환자를 통해 세상을 보고, 글을 통해 생의 의미를 함께 고민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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