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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이 여직원 성추행” 피해자 말 듣고 쓴 글, 명예훼손?

중앙일보 2019.11.04 05:00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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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는 주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여직원과의 스캔들은 물론이고, 회식 후 여직원의 몸을 만지며 성추행을 일삼았다. 2004년 여기자를 성추행했던 Y는 세 살 버릇을 여든까지 갖고 영국대사관으로 와 수많은 여성을 희롱했다.”
 
대학원생 A씨(39)가 2016년 영국 런던에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의 일부다. A씨는 전직 대사관 직원과 성추행 피해자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중 많은 부분이 사실로 인정됐다면 그래도 A씨는 명예훼손죄로 처벌받게 될까.  
 

“소문만으로 단정적 표현한 건 명예훼손”

지난해 1심 재판부는 A씨가 올린 글 중 ‘2004년 여기자를 성추행했던 외교관 Y’ 부분만 무죄로 판단했다. Y외교관이 술집에서 여기자에게 강제로 입을 맞췄고, 만취해 실수를 저질렀다고 시인했다는 내용의 언론 기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다만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나 소문이 존재하는 정도만 인정된다”며 “상습적으로 여성들을 성추행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한 건 명예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사항”이라고 판단해 A씨에게 벌금 150만원형을 선고했다.  
 

성추행 피해자의 구체적인 증언…달라진 결과

그러나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동부지법 형사항소1부(부장 유남근)는 A씨의 글 중 더 많은 부분이 사실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회식 후 여직원의 몸을 만지며 성추행을 일삼았다’고 표현한 부분과 관련해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이 직접 인증서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한 것이다. B씨는 “2009년 회식 자리에서 식사하고 노래방에 있다가 3차로 런던의 한 가라오케로 이동했다. Y외교관이 화장실 위치를 안내해달라고 요청한 후 빈방으로 밀어 넣어 소파에 앉히고 신체를 만지는 등 추행했다”고 밝혔다.
 
이에 Y외교관은 “2009년 송년회에서 직원들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먹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술에 취해 노래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3차를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재판부는 Y외교관의 반박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에 제출한 인증진술서에 피해당한 날짜, 경위, 내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반면 Y외교관은 술에 취해 노래방 이후의 구체적 행적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진술한 점에 비춰 “A씨가 작성한 내용이 허위사실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여직원과의 스캔들’ 부분도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부에 따르면 Y외교관이 영국대사관에 재직할 당시 여직원과 불륜 관계에 관한 소문이 직장, 교민사회에 퍼져있었다.
 
이에 대사관 전 직원이 A씨에게 “Y외교관이 불륜 관계인 공관 직원을 부서 이동시켜줬다”며 “외교부 감사담당관실에 이를 제보했다”고 알려줬던 것이다. 실제로 Y외교관은 징계 조치를 받지는 않았지만, 국정원의 감찰을 받았다.
 
재판부는 “외교관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는지는 공적 영역에 해당할 여지가 크고 ‘스캔들이 있었다’는 표현으로만은 비방이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A씨가 쓴 ‘수많은 여성을 희롱했다’ 부분에 대해서는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이 부분만 유죄로 인정됐다. A씨는 결국 글을 쓴지 3년 만인 지난 24일 벌금 50만원형을 선고받았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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