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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셋이 모이면 지구를 구한다, 남자 영웅은 거들뿐

중앙일보 2019.11.02 08:00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를 이끌어가는 여성 3인방. 사라 코너 역으로 28년 만에 복귀한 린다 해밀턴과 미래에서 온 인간 병기 그레이스 역의 매켄지 데이비스, 각성 끝에 여전사로 거듭나는 대니 역의 나탈리아 데이즈 활약이 두드러진다. [사진 터미네이터 예고편 캡처]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를 이끌어가는 여성 3인방. 사라 코너 역으로 28년 만에 복귀한 린다 해밀턴과 미래에서 온 인간 병기 그레이스 역의 매켄지 데이비스, 각성 끝에 여전사로 거듭나는 대니 역의 나탈리아 데이즈 활약이 두드러진다. [사진 터미네이터 예고편 캡처]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터미네이터도 변하게 한 할리우드 페미니즘

말 그대로 ‘돌아왔다’. 가공할 액션과 압도하는 스케일 및 특수효과, 그리고 묵시록적 세계관에 맞서는 인류 구원의 메시지까지. 터미네이터 1편(1984)과 2편 심판의 날(1991)을 연출한 제임스 캐머런(카메론)이 28년 만에 제작자로 복귀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얘기다. 캐머런만이 아니다. 인류 저항군 사령관 존 코너의 어머니 사라 코너를 연기했던 린다 해밀턴(63)도 28년 만에 같은 캐릭터로 복귀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T-800 역할의 아놀드 슈워제네거(72)와 해밀턴이 나란히 화면에 잡힐 때 30년 만의 동창회 기분이 든 것은 필자만이 아니리.
 
지난달 30일 개봉해 사흘간 61만명이 관람했으니 출발이 좋다. 무엇보다 ‘오리지널’의 리부트(Reboot‧캐릭터와 이야기의 재해석)라는 점에서 실망스러웠던 3~5편의 패착을 극복했다는 평가다. 기본 골격은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이번엔 Rev-9이라는 모델)가 평범한 ‘미래의 희망’을 공격하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역시 미래에서 온 전사가 터미네이터와 싸운다는 것으로 동일하다.  
 

과거에서 미래까지 여전사 3인방 활약

달라진 것은 극 중심에 해밀턴을 비롯한 여성 3명의 활약이 있다는 사실. 심지어 시리즈의 핵심 인물인 슈워제네거마저 극 중반 넘어 나타나서 이들의 조력자로 활약할 뿐이다. 영화 홍보를 위해 지난달 내한했던 팀 밀러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간 남자 주인공이 모든 걸 다 부수고 복수하는 이야기는 너무 많았다. 여성들이 그런 주인공을 하는 게 훨씬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고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에겐 없는 시퀀스(장면)가 생겨났다.”  
 
미래에서 온 그레이스 역의 매켄지 데이비스(왼쪽)과 사라 코너로 복귀한 린다 해밀턴.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미래에서 온 그레이스 역의 매켄지 데이비스(왼쪽)과 사라 코너로 복귀한 린다 해밀턴.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원조 여전사와 미래형 여전사를 각각 연기한 린다 해밀턴과 나탈리아 레이즈.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원조 여전사와 미래형 여전사를 각각 연기한 린다 해밀턴과 나탈리아 레이즈.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멕시코시티에서 공장 근무자로 평범하게 살던 대니 라모스(나탈리아 레이즈)가 미래로부터 온 Rev-9(가브리엘 루나)에게 쫓기는 상황. 역시 미래에서 온 슈퍼 솔져 그레이스(매켄지 데이비스)가 이를 저지하는 가운데 홀연히 등장한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가 도움을 주면서 이야기는 본 궤도를 탄다. 178cm(라는데 더 커보이는) 장신의 데이비스가 샷건에 철근, 쇠고랑까지 휘두르며 ‘업그레이드 된 인간 병기’의 진수를 보이고 수류탄 쯤이야 가볍게 투척하는 은발의 여전사 해밀턴도 명불허전이다. 운전도 못하고 총 잡는 것도 두려워하던 대니 역의 나탈리아가 각성 끝에 여전사로 진화하는 모습도 흥미롭다.
 
그런데 ‘사소한 발견’이 주목한 장면은 따로 있다. 가까스로 Rev-9의 추격을 따돌린 셋은 외딴 모텔에 은신해 서로의 정체를 탐문한다. 사라 코너가 자신의 과거를 밝히자 그레이스도 미래에서 오게 된 임무를 털어놓는다. “대니를 위험에 빠뜨리면 가만 안둘 것”이라거나 “나 없인 10시간도 못 버틸 것”이라며 티격태격 하던 이들은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때로 의견이 맞지 않아 몸싸움을 불사할 때도 있지만 터미네이터를 퇴치하기 위한 ‘작전 싸움’이 불붙을 때 장면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강력하다.
 
"접시가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여자 셋이 모이면 그런다나요/ 그러나 우리들은 천만의 말씀/ (중략)/ 아름다운 노래가 쏟아지지요"
 
1966년 발매된 여성 3인조 ‘이시스터즈’의 앨범 ‘사랑의 징검다리’에 수록된 ‘여자 셋이 모이면’이라는 노래 가사다. 이 노래는 몰라도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속담(을 빙자한 비방)은 들어봤을 것이다. 여자들이 모이면 허튼소리만 지껄이고 시기와 질투로 뭉치기 어렵다는 뜻이라나. 역설적으로 여자들이 뭉치는 힘을 그만큼 남자들이 경계해왔다는 걸로 해석되기도 한다.
 
여자 셋이 모이는 게 별일인가 싶지만 따지고 보면 영화에서 여자 셋도 아닌, 여자 둘이 한 화면에 잡히는 게 흔치 않았던 시절도 있다. 심지어 그들이 ‘남자’ 얘기가 아닌, 그들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은 예외적인 상황에 속했다.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인 미국 할리우드에서도 말이다.
벡델테스트의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으로 알려진 1985년 앨리슨 백델의 만화 '다이크 투 워치 아웃 포'. [사진 위키피디아]

벡델테스트의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으로 알려진 1985년 앨리슨 백델의 만화 '다이크 투 워치 아웃 포'. [사진 위키피디아]

 
이걸 확인시켜준 게 ‘벡델테스트(또는 벡델-월리스 테스트)’다. 이 아이디어는 1985년 미국의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그린 만화에 처음 등장했다. 테스트 통과 기준은 ^이름이 붙여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등의 세 가지다.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라 하겠다.  
 

'벡델테스트' 적용하니 영화 절반 '미달' 

단순해 보이지만 201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영화관이 이를 적용해본 결과, 영화 절반이 탈락했다. 고전 영화가 아니라 현재 상영작도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칸 허슬’(2014)은 통과했는데 딱 한 장면에서 여자 둘이서 손톱 손질 얘기를 한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스웨덴은 벡델테스트 통과 영화에 ‘A’ 마크를 표시하고 있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최근엔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 비중이 크게 늘었다(bechdeltest.com에서 확인 가능)
 
스크린에 재현된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이고 남녀 비중이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3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우먼 인 할리우드’가 잘 보여준다. 영화 188편과 할리우드 미디어산업 종사자 96명과의 인터뷰, 그리고 방대한 데이터를 토대로 이 다큐가 드러내는 영화산업 실상은 다음과 같다.
 
■ 1990~2005년 전체 관람가 흥행작 상위 101편 중에서 대사가 있는 역할 72%는 남자였다.
■ 내레이터 5명 중 4명 이상이 남자였다.  
■ 2017년 흥행작 상위 100편에서 남주인공은 여주인공보다 화면에 두배 더 노출됐다.
■ 전체 관람가 영화 속 여성의 의상은 남성보다 노출이 세배 더 심하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니까 그런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사회생활에서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지위(에 맞먹는 위치)에 있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영화‧TV 등 미디어 경험이 자라나는 세대의 성역할과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2012년 ‘메리다와 마법의 숲’과 ‘헝거게임’이 개봉하자 미국에선 양궁 수업을 듣는 소녀들의 숫자가 105%나 급증했다. 인기를 끈 두 영화의 주인공이 모두 활쏘기가 취미이자 생존 무기인 것과 관련 있지 않을까.  
 
[사진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사진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우먼 인 할리우드’는 이를 ‘CSI 효과’에 빗댄다. 2000년부터 미국 CBS에서 방영된 ‘CSI 과학수사대’에서 여성법학자가 나온 뒤 법의학 분야 여성들 숫자가 현저히 높아진 것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서 드라마 ‘허준’과 ‘대장금’이 흥행할 당시 한의학과 경쟁률이 치솟은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는 여학생의 의대 진학률을 높였다.
 

CSI 이후 법의학 전공 여성들 급증 

1991년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주연을 맡았던 지나 데이비스는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디어에서 여성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알게 됐어요. 여성 캐릭터로부터 영감을 받을 기회를 여성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거죠.” 
 
이런 각성에 2007년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를 설립한 그는 영화 산업 전반의 성‧인종 차별 철폐에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미디어 경험을 달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만약 그들이 볼 수 있다면, 될 수 있다(If they can see it, they can be it)”.
 
영화 '델마와 루이스' 주연으로 유명한 지나 데이비스는 할리우드 성차별을 줄이기 위해 2007년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를 설립하고 광범위한 연구를 해왔다. 다큐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사진 마노엔터테인먼트]

영화 '델마와 루이스' 주연으로 유명한 지나 데이비스는 할리우드 성차별을 줄이기 위해 2007년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를 설립하고 광범위한 연구를 해왔다. 다큐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사진 마노엔터테인먼트]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가 구글과 협력으로 개발한 GD-IQ(Geena Davis Inclusion Quotient)를 측정하는 장면. 영화 속에서 남녀 주인공의 등장과 말하는 시간을 머신 러닝을 통해 자동적으로 추출한다. [사진 홈페이지 캡처]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가 구글과 협력으로 개발한 GD-IQ(Geena Davis Inclusion Quotient)를 측정하는 장면. 영화 속에서 남녀 주인공의 등장과 말하는 시간을 머신 러닝을 통해 자동적으로 추출한다. [사진 홈페이지 캡처]

‘다크 페이트’에서 사라 코너는 대니가 Rev-9에게 쫓기는 이유가 그녀의 ‘자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니가 미래의 인류 사령관을 낳을 어머니인 탓에 미래 인공지능(AI) 로봇들이 터미네이터를 보낸 거라고. 그게 사라 코너의 운명이었고 1984년 캐머런 감독이 인류 미래에 관한 SF 블록버스터를 만들 때 여성의 역할을 상상한 최대치였다.  
 
35년이 지난 2019년 우리는 전혀 다른 여전사를 만난다. 여성들끼리 “네가 나를 구해줬다”고 말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비록 마지막 숨통을 끊는 ‘멋짐’은 슈워제네거 몫이지만, 그래도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돌아올게(I will be back)”를 말하는 이도 이번엔 사라 코너다. “도망가지 않겠다. 이 자리에서 맞서 싸우겠다”라는 결심이 반드시 남자 몫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적어도 ‘다크 페이트’를 보고 자라는 여자아이라면 더 그렇게 생각할 테다.  
 
다큐 '우먼 인 할리우드'는 스크린에 재현되는 여성의 역할과 비중이 제한적이고 이는 미래세대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한다. 영화 '원더 우먼' 개봉 후 여성 히어로를 꿈꾸기 시작한 아이들. [사진 마노엔터테인먼트]

다큐 '우먼 인 할리우드'는 스크린에 재현되는 여성의 역할과 비중이 제한적이고 이는 미래세대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한다. 영화 '원더 우먼' 개봉 후 여성 히어로를 꿈꾸기 시작한 아이들. [사진 마노엔터테인먼트]

참고로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 2월 발표한 '2018 한국영화 산업 결산'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실사 한국영화 39편 중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총 10편이라고 한다. ‘국가부도의 날’ ‘도어락’ ‘협상’ ‘허스토리’ ‘치즈인더트랩’ ‘마녀’ ‘상류사회’ ‘스윙키즈’ ‘완벽한 타인’ ‘인랑’이다. 2019년 한 해 동안 즐긴 영화들을 돌이켜보자. 그 가운데 몇 편이 벡델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까. 여자 셋이 모여 '접시 깨기' 이상을 한다는 걸 보여준 영화는 과연 몇 편일까.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소한 발견(사발)
 문화 콘텐츠에서 사소한 발견을 통해 흥미로운 유래와 역사, 관련 정보를 캐고 담는 '사발'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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