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50원 나비효과···초유의 APEC 취소, 미중 무역전쟁도 꼬였다

중앙일보 2019.10.31 14:37
지난 6일부터 시작된 칠레 반정부 시위로 31일까지 18명이 사망하고 7000여명 이상이 체포됐다. 칠레 정부는 19일 수도 산티아고에만 발령됐던 비상사태와 야간 통행금지를 10개 주요 도시로 확대했다. [로이터=연합]

지난 6일부터 시작된 칠레 반정부 시위로 31일까지 18명이 사망하고 7000여명 이상이 체포됐다. 칠레 정부는 19일 수도 산티아고에만 발령됐던 비상사태와 야간 통행금지를 10개 주요 도시로 확대했다. [로이터=연합]

 다음 달 16~17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개최 17일을 앞두고 전격 취소되면서 국제 외교가에 비상이 걸렸다. 세계 주요 21개국이 참여하는 정상급 회의가 2주일 여를 앞두고 취소돼 참여 국가들이 추진했던 다자 외교, 양자 외교 일정까지 줄줄이 혼란을 겪게 됐다.  
APEC 사무국은 31일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이 11월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APEC 홈페이지]

APEC 사무국은 31일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이 11월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APEC 홈페이지]

 
올해 APEC은 열리지 않을 전망이다. “APEC 정상회의 사무국 측이 다른 장소에서는 행사를 열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고 블룸버그통신이 31일(현지시간) 전했다. 그간 30차례 열린 APEC 회의가 열리지 않는 것은 처음이다. 칠레는 지난 6일 지하철 요금 30칠레페소(약 50원) 인상 조치로 촉발된 시민들의 반정부시위로 18명이 사망했고 국가 비상사태까지 선포된 상태다.

미·중 1단계 합의안 서명 연기되나

지난 11일 미 백악관에서 류허 중국 부총리(왼쪽)와 로버트 라이트하우저 미 무역대표부 대표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1일 미 백악관에서 류허 중국 부총리(왼쪽)와 로버트 라이트하우저 미 무역대표부 대표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APEC 정상회의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미ㆍ중 정상이 1단계 무역 협상안에 서명할 것인지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28일 시카고 행사 참석을 위해 떠나기 직전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중국과 (무역) 협상에 서명하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1단계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매우 큰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산티아고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만나 1단계 합의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면서 이날 뉴욕 증시도 급등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이후 사흘 만에 칠레가 APEC 회담을 취소하면서 백악관도 곤란해졌다. 호건 기들리 백악관 부대변인은 30일(현지시간) “우리는 같은 시간대에 중국과의 역사적인 1단계 합의를 마무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예정대로 미·중 무역 합의안 서명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장소를 다시 구하는 게 관건이다. 로이터 통신은 미·중 무역 협상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은 하와이나 알래스카를 잠재적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으며, 중국 측은 마카오를 거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중국 상무부 산하 국제무역경제협력연구원의 메이신위 연구원도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에 "지난 29일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합의문의 기술적 협의가 기본적으로 완성됐다”며 “회담이 제3국에서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양국 국기를 앞에 두고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양국 국기를 앞에 두고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APEC 취소로 양국 협의안 서명이 늦춰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 CNBC 방송은 “칠레의 APEC 개최 포기로 미·중 정상이 1단계 무역합의를 언제 서명할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APEC 취소로 양국이 시간을 번 만큼 구체적 사안에 대해 더 밀도 있게 들여다볼 것이란 점에서다. 도이체방크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토르텐 슬로크는 블룸버그통신에 “(서명 연기는) 무역전쟁의 불확실성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우리가 ‘2단계 또는 3단계 합의’를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을 제기한다”고 지적했다. 
 

지구촌 과제 기후위기 회의에도 불똥

지난달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4차 유엔총회. [유엔 홈페이지]

지난달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4차 유엔총회. [유엔 홈페이지]

여파는 국제적인 기후 변화 대응에도 예상치 못했던 지장을 주고 있다. 칠레는 APEC에 이어 12월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5) 개최도 취소했다. 탄소 배출량의 급속한 증가를 막을 수 있는 각국의 추가 대응책 마련이 주요 의제였다. 기후 전문가들은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세계과학자협회 정책국장 레이철 클리투스는 로이터통신에 "어떤 형태로든 회의가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트리샤 에스피노사 UN 기후변화협약총회 의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기후변화협약 총회를 열 대체 장소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AP는 UN 관계자를 인용해 뉴욕과 비엔나, 제네바 등 UN 기구가 있는 다른 지역에서 회의를 개최하는 방안이 고려되고 있다고 전했다. 
 

외교 현안 산적 한국엔 ‘플랜B’ 고민

24일 북한 핵무기연구소 관계자들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위한 폭파작업을 했다. 사진은 4번 갱도 관측소 폭파 순간. 북한 핵무기연구소 관계자들은 '4번 갱도는 가장 강력한 핵실험을 위해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사진공동취재단]

24일 북한 핵무기연구소 관계자들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위한 폭파작업을 했다. 사진은 4번 갱도 관측소 폭파 순간. 북한 핵무기연구소 관계자들은 '4번 갱도는 가장 강력한 핵실험을 위해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사진공동취재단]

APEC 취소는 외교 현안이 산적해 있는 한국에도 시나리오에 없었던 일이다. APEC 정상회의 기간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문 대통령은 대북 정책, 방위비 분담금 등 한·미 현안을 점검하며 견해차를 좁힐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중국·러시아 등 다자외교 무대를 계기로 한반도 주변 4강과의 양자회담 등을 통해 비핵화 대화 교착을 풀고자 했던 청와대로선 APEC 정상회의 무산으로 ‘플랜B’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APEC 정상회의 취소로 일본의 수출규제 및 한국의 한일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 등으로 최악의 상태인 한·일 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외교가에서는 아세안+3 정상회의나 APEC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간 회담이 열릴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으나 이번 일로 회담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 셈이다. 일본 측은 이미 11월중 한·일 정상회담은 없다고 언론을 통해 알려 왔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APEC 정상회의) 취소 소식을 들었고 앞으로의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입장을 내놨다.
 
박성훈 기자 park.seonghu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