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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언론에 대한 징벌적 배상제 도입, 저널리즘 위축 부른다

중앙일보 2019.10.31 00:37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1994년 6월 여배우 니콜 심슨과 남자친구인 로널드 골드먼이 LA 저택에서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된다. 전 남편인 미식축구의 영웅, 흑인배우 OJ 심슨이 범인으로 지목됐다. 부와 명성, 미모의 백인 아내를 차지해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한 흑인의 비극적인 몰락이라는 점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심슨은 인종차별의 관점으로 몰아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심슨은 2년 뒤 민사소송에선 3350만 달러의 손해배상 평결을 받았다. 실제 손해를 전보하는 금액은 850만 달러, 나머지 2500만 달러는 징벌적 배상금 (punitive damages)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쇼생크 탈출’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사건은 징벌적 배상의 적절한 예가 된다. 이 제도의 요지는 가해자의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행위에 대해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물리도록 한 것이다. 악질범에게 실제 손해만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는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 때 딱 떨어지는 대안이 된다.
 

왜곡 언론 처벌하자는 박원순
정부 비판·비리 고발 위축시켜

새삼 오래된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최근 발언 때문이다. 박 시장은 왜곡언론을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미국에 있는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시장의 발언은 조국 일가에 대한 언론보도 태도를 문제 삼으며 나왔다. 노골적으로 조국을 지지해온 그동안의 행적으로 봐서 박 시장의 의중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언론의 메커니즘을 잘 모르는 위험한 주장이다. 언론은 진실만을 쓰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쫓기는 시간에 제한된 취재원으로 거대한 악의 뿌리를 캐내기에는 무리가 있게 된다. MBC ‘PD 수첩’의 광우병 보도가 적절한 예다. 대법원은 ‘PD수첩’ 제작진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허위보도인데 어떻게 무죄판결이 났을까. 주요 쟁점이었던 ▶다우너 소(주저앉는 증상의 소)를 광우병 발병 소로 보도한 것 ▶한국인의 유전자의 광우병 취약성 ▶아레사 빈슨의 사망 원인에 대해 모두 허위 보도로 판단했다. 판결 취지는 언론자유를 위해 비록 허위가 있더라도 고의성이 없고, 공익(public interest)을 위한 사안이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 시장의 언론에 대한 적대감은 지나치게 소아병적이다. 그가 도입을 주장한 징벌적 배상제도 미국의 경우 일부 주에서만 실시하고 있다. 더구나 배상액은 배심원이 정하는데 배심제가 없는 우리나라가 도입하기는 무리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특히 공인에 대해서는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를 증명하게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사실상 공인에 대한 비판엔 적용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 오히려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되는 악법이라며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미국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영국·캐나다 등 일부 영미법계 국가에서 판례에 의해 발전해 온 제도로 우리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 중에서는 찾기 힘들다.
 
문제는 징벌적 배상제의 도입은 곧 저널리즘의 위축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언론이 소신껏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공직자 비리를 파헤치기가 어렵게 된다. 영세한 언론사의 경우 배상금액이 무서워 취재를 꺼리는 이른바 위축효과 (chilling effect)가 나타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지금의 시대는 우울하다. 진영논리에 따라 쏟아지고 있는 가짜뉴스는 안타깝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지금의 혼란스러운 언론 생태계를 이용해 언론 규제를 주장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박 시장은 “대한민국은 지금 정상적 국가가 아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운동장에서 놀게 하고 그 대신 게임의 규칙을 위반하는 언론의 경우 딱 핀셋으로 잡아다가 운동장 밖으로 던져버리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 핀셋을 언론에 적용하기에 앞서 혹세무민하는 정치권으로 먼저 가져가라는 게 국민의 바람일 것이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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