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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어택] ‘레깅스, 너 보라고 입은 게 아닙니다’

중앙일보 2019.10.31 00:22 종합 29면 지면보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남성 A씨는 여성 B씨의 하반신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8초 정도 동영상을 찍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부가 벌금 70만원과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24시간 이수를 판결하자, A씨는 양형이 과중하다며 항소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입고 있는 레깅스는 … 여성들 사이에서 운동복을 넘어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 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28일자 ‘레깅스 몰카 재판’ 기사 중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A씨께,
 
선생은 참 다행이라고 여기시겠죠. 축하한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네요. 양형 부당 항소인데 무죄 선고라. 항소심 판결문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았다’는 대목이 있던데, 합의하셨나 봐요. 피해자가 어렵게 용서할 마음을 먹은 듯하니, 제3자인 제가 더는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무죄 판결이 이런 행위를 다시 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닌 건 잘 아시겠죠.
 
선생 덕분에 논쟁이 뜨겁습니다. 그런데 논점이 ‘몰카’가 아니라 ‘레깅스’로 옮겨갔더군요. ‘몰카’는 당연히 범죄라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아서겠죠. 애꿎은 레깅스가 대신 도마 위에 올랐네요. 혹시 선생도 그런 생각 하셨나요. ‘피해자가 몸매를 드러내고 싶어 레깅스를 입었다. 그래서 쳐다봤고 영상으로 남겼다’는.
 
제가 다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도 여성 회원들이 레깅스 차림으로 운동합니다. 저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쪽에 눈길이 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아 고개를 돌리죠.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혹시 몸매를 자랑하려 입은 건 아닐까’라고요.
 
최근 읽은 책의 한 구절을 알려드리죠. ‘여성들이 시선을 끌고 싶어서, 혹은 몸매를 자랑하고 싶은 ‘부심’ 때문에 레깅스를 입는다는 건 순전히 억측이다. 또 만약에 어떤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것을 즐긴다 할지라도 그것이 타인의 몸을 뚫어지라 볼 수 있는 권리로 이어지진 않는다’(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이 챕터 제목이 뭐냐면요, ‘레깅스, 너 보라고 입은 게 아닙니다’입니다. 이제 아시겠죠.
 
장혜수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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