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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회복적 사법’ 정준영 판사의 믿음

중앙일보 2019.10.31 00:18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가영 사회1팀장

이가영 사회1팀장

“사람은 변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요즘 법원에서 가장 ‘핫’한 사람, 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의 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사건과 PC방 살인사건 항소심을 심리 중인 그는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도 맡았다. 자식들과 동반자살하려다 살아난 어머니에겐 보석을 허가해 지켜본 뒤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빚 문제로 다투다 모친을 죽게 한 딸은 “사회 책임도 있다”며 5년을 감형했다. 담당 사건과 선고 내용으로 이미 핫한 그가 다시금 주목받은 건 이재용 부회장 파기환송심 첫 재판에서 남긴 말 때문이다.
 
정 판사는 부친 이건희 회장을 거론하며 이 부회장에게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버금가는 노력 ▶실효적 준법감시제도 마련 ▶재벌 체제의 폐해 시정 등을 5분여간 주문했다. 일부 시민단체는 “집행유예 해주려는 의도”라 목소리를 높였고, “판사가 재판만 잘하면 되지 웬 훈계냐”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노트북을 열며 10/31

노트북을 열며 10/31

하지만 그의 재판을 지켜본 입장에선 고개가 끄덕여졌다. 법복을 입은 25년간 그가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을 실제 재판과 접목하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을 알아서다. 정 판사는 회복적 사법을 “법원이 단지 양형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피고인 양 당사자가 분쟁을 직접 마주하고 서로 협의·조정해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법원이 어떤 결정을 하기 전 피고인에게 변화할 시간을 주고 이를 살펴본 다음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도 했다.
 
법전대로만 살면 되는 엘리트 판사 정준영이 회복적 사법에 천착한 이유는 뭘까. 그가 준 답이 바로 첫머리에 언급한 “사람은 변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고교 시절 경험담을 들려줬다.
 
신설 고교의 모범생 반장이던 그는 급우가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자 고민에 빠졌다. 그가 아는 급우는 좋은 친구였다. 그 내용을 주변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진정서’를 썼다. “동의하는 사람은 서명해 달라”며 연판장도 돌렸다. 다행히 그 친구는 퇴학을 면했고, 이후 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 판사의 동기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재용 부회장 사건은 대법원에서 유·무죄 판단이 끝난 만큼 정 판사는 양형 위주의 결정을 하면 된다. 그런 그가 자칫 이 부회장을 선처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건 ‘사람은 변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회복적 사법에 대한 소신 때문일 것이다. 정 판사의 소신에 이 부회장은 어떤 응답을 할까.
 
이가영 사회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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