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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걸지 않는 것도 학대가 될 수 있다, 그가 노인이라면

중앙일보 2019.10.30 15:00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6)

요양보호사 자격증 이론 수업 중 '노인 학대 사례' 예문을 읽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쳐다보지 않는다.
말을 걸지 않거나 대화를 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을 지속해서 무시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노인 학대 중 ‘노인과의 접촉 기피’라는 정서적 학대 행위의 세부 내용이었다. 아버지에게 화났을 때 내가 보였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는 또 어떠했던가. 바쁜데 아침밥 먹고 가라 붙잡는다고 짜증 내고, 내 물건 만졌다고 화내고, 하려는 거 못하게 하면 소리 지르고, 부모님께 정서적 학대를 수시로 해왔다. 그간 나의 행동이 눈앞에 그려지며 얼굴이 후끈했다.
 
노인학대가 주로 발생하는 장소는 ‘가정’이고, 학대 행위자는 첫째가 아들, 둘째가 배우자, 그리고 딸 순이란다. 노후에 대한 적절한 대비가 없다면 어쩌면 가족이 가장 잔인한 관계로 종결될지도 모른다. [사진 pexels]

노인학대가 주로 발생하는 장소는 ‘가정’이고, 학대 행위자는 첫째가 아들, 둘째가 배우자, 그리고 딸 순이란다. 노후에 대한 적절한 대비가 없다면 어쩌면 가족이 가장 잔인한 관계로 종결될지도 모른다. [사진 pexels]

 
노인복지법 제1조의 2 (정의) 제4항에 따르면 노인에 대하여 신체적·정신적·정서적·성적 폭력 및 경제적 착취 또는 가혹 행위를 하거나 유기 또는 방임을 하는 것을 노인 학대라 한다. 요양보호사는 이와 같은 행위 발견 시 신고(1577-1389, 1년 365일 빨리 구하라는 의미)할 의무가 있고 신고의무를 위반할 경우 500만 원 이하 과태료를 물린다.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시설로 보낸다고 협박한다. 의사 표현 능력이 없는 노인의 연금, 재산 등을 가로챈다. 노인부양을 전제로 재산을 증여받고 부양의무는 이행하지 않는다. 스스로 식사와 배변이 힘든 노인을 방치한다. 욕창, 염증 등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병간호를 소홀히 한다. 연락을 두절하거나 왕래를 하지 않는다. 인지기능을 상실한 노인을 고의로 가출, 또는 배회하게 한다. 낯선 장소에 버린다…."
 
교재에 예시된 신체적·성적·경제적 학대 사례들은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아팠다. 선생님은 이해와 기억을 위해 소리 내 읽으라 했지만, 수강생들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마지막은 한숨 섞인 신음으로 마무리되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여러분,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뭔지 아세요?”
“...”
“오래 살기 때문이에요.”
 
예전엔 어려운 상황에 이르기 전에,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연장되면서 본인에게도 가혹하고 가족들도 견디기 힘든 문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한 수강생이 맞받아쳤다.
 
"결론은 하나네요. 내 돈은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한다!”
그나마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사정이 나을 것이라는 얘기일 터. 씁쓸했다.
 
노인학대가 주로 발생하는 장소는 ‘가정’이고, 학대 행위자는 첫째가 아들, 둘째가 배우자, 그리고 딸 순이란다. 우리 사회 기본이며 최후까지 지켜져야 할 ‘가족’이란 가치가 노후에 대한 적절한 대비와 마음 자세가 없다면 어쩌면 가장 잔인한 관계로 종결될지도 모를 안타까운 현실. 2017년 이미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4% 이상인 사회)에 접어든 대한민국의 민낯이기도 하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한 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을 경우 비교적 쉽게(240시간의 교육시간이 50시간으로 줄어드는 혜택이 있다)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물론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취득해도 당장은 장롱면허겠지만,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으리라는 마음이 컸다.
 
노인들은 흥미와 의욕이 상실되고 조심성은 증가하며 결단과 행동이 느려진다고 한다. 보통의 노인들은 익숙한 태도와 방법을 고수하고 새로운 변화를 싫어하고 도전적인 일을 꺼리게 된다. [사진 pixnio]

노인들은 흥미와 의욕이 상실되고 조심성은 증가하며 결단과 행동이 느려진다고 한다. 보통의 노인들은 익숙한 태도와 방법을 고수하고 새로운 변화를 싫어하고 도전적인 일을 꺼리게 된다. [사진 pixnio]

 
막상 시작하니 퇴근 후 학원으로 달려가 매일 4시간씩 수업 듣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눈이 침침해 글씨는 아른거리고 엉덩이는 납작하게 찌그러지는 느낌이랄까? 학교 다닐 때 어떻게 온종일 앉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게다가 요양보호사가 ‘치매·중풍 등 노인성 질환으로 독립적인 일상생활을 수행하기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노인 요양 및 재가 시설에서 신체 및 가사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교육 내용이 방대했다. 노인복지의 개념부터 관련 제도, 인권과 직업윤리, 일상생활 지원과 관련한 각종 서비스, 노인 질환 관련 의학지식과 응급상황 대처까지, 진도를 나갈수록 두려움이 커졌다.
 
아버지와 둘이 산 지 10년이라고 마치 아버지 전문가라도 된 듯 언니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점점 고개가 숙여진다. 노년기에 이른 아버지에 대해 ‘우리 가족, 나의 아빠’ 그 이상의 배려는 고려하지 않았던 듯싶다.
 
“예전엔 안 그러셨는데 왜 그러세요?”라는 말을 쉽게 했고, “제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하며 섭섭해했다. 때론 “이렇게 하면 더 쉽고 편한데, 왜 이걸 안 고치시나?” 아버지를 바꾸려 들기까지 했다.
 
내 아버지 역시 팔순을 넘긴, 흥미와 의욕이 상실되고 조심성은 증가하며 결단과 행동이 느려지는, 익숙한 태도와 방법을 고수하고 새로운 변화를 싫어하고 도전적인 일을 꺼리며 융통성이 없어지는 한 사람의 노인(요양보호사 자격시험 교재에 언급된 노인의 특성) 임을 인정해야 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의 역할은 이를 외면하고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상실감과 고립감이 깊어지지 않도록 위로하고 배려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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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 푸르미 공무원 필진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 아버지와 10년째 동거 중인 20년 차 공무원. 26년간 암 투병 끝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와 동거를 시작했다. 팔순을 넘어서며 체력과 인지능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아버지를 보며 ‘이 평화로운 동거가 언젠가 깨지겠지’ 하는 불안을 느낀다. 그 마음은 감춘 채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버지에게 얹혀살고 있다”고 주변에 이야기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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