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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코드의 저주···산후우울증 39세 "남편도 모르게 병원 갔다"

중앙일보 2019.10.30 01:00 종합 14면 지면보기
우울증을 앓고 있는 서귤 작가가 치료 사실 공개에 따른 고민을 다룬 만화 내용. [그림 판타스틱 우울백서(서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서귤 작가가 치료 사실 공개에 따른 고민을 다룬 만화 내용. [그림 판타스틱 우울백서(서귤)]

마음의 병, 우울증 ③

회사원 최모(31)씨는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우울증이 심상치 않아보인다"는 진단을 받았다. 검진기관의 의사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상담을 받을 것을 권유했다. 최씨는 과로와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려웠다. 퇴근해도 퇴근한 것 같지 않았고, 무기력하게 늘어졌다. 이런 증세가 찾아온지 3년이 넘었다. 우울증일 수도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정신과 진료라서 주변에 물어보기가 꺼려졌다. 그런데 병원에 가려다 포기했다. 이유는 'F코드' 때문이다. 

"정신과 진료기록이 F코드로 남아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민간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고, 회사에 알려지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아직 미혼인데 결혼할 때 문제가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정신과 진료기록에 F코드
환자들 유출 걱정에 병원 안 가
복지부 “유출 땐 엄격히 처벌”

낙인 피하려 Z코드 만들었지만
상담만 가능, 우울증약 처방 못해

우울증 진료를 가로막는 가장 견고한 장벽은 F코드이다. 통계청의 표준질병사인분류표에 나온다. C코드는 암, F코드는 정신질환 이런 식이다. 우울증은 F32(우울에피소드), F33(재발성 우울장애)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은 F코드를 피한다고 내과·가정의학과 등을 찾는다. 홍나래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신과 약이 걱정된다고 내과 등에 가서 안정제ㆍ수면제만 처방받는 환자들이 꽤 된다. 하지만 약을 쓰면 어느 과를 가든 F코드가 된다”면서 “안정제·수면제는 근본적 치료보다 증상만 완화해주는 편이라 병만 깊어진다”고 지적했다.
F코드를 걱정해서 수면제 등만 처방받았다가 병이 악화되는 경우가 생긴다. [사진 Pixabay]

F코드를 걱정해서 수면제 등만 처방받았다가 병이 악화되는 경우가 생긴다. [사진 Pixabay]

F코드 진료기록은 새 나갈 수 없다. 홍정익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F코드로 분류되더라도 이런 기록이 유출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의료법·건강보험법·개인정보보호법 등에 엄격하게 보호하기 때문이다. 유출하면 불법으로 처벌받는다. 
 
우울증 약을 장기간 먹은 환자도 민간보험에 가입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다만 최근 3개월 내에 약의 종류를 바꿨을 경우 제한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원칙일 뿐 현장에서 더 제한받을 수도 있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일부 민간보험이 우울증 치료를 받았거나 입원한 사람을 제외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우울증 치료 현실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우울증 치료 현실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정신과 진료의 문턱이 좀체 낮아지지 않자 정부는 2013년 Z코드를 만들었다. Z71.9(보건일반상담)가 그것이다. 정신과 상담만 받을 경우 F코드가 아니라 이걸 쓸 수 있게 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한국만의 '편법'이었다. 지난해 8만8518명이 Z코드 진료를 받았다. 2014년 8만3606명에서 이듬해 9만482명으로 늘었으나 그 이후 정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정성원 계명대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Z코드를 쓰면 약을 처방할 수 없고 재진(再診)에 해당하지 않는다. 약을 처방하려면 F코드로 바꿔야 한다"며 "Z코드가 초기 환자의 평가에 시간을 버는 효과가 있을 뿐 잘 기능하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병원에 잘 안가니 건보 재정 지출도 극히 미미하다. 지난해 우울증 환자가 쓴 건보 재정은 3319억원으로, 전체의 0.6%에 불과하다.
F코드 때문에 치료 자체를 꺼리는 우울증 환자가 꽤 많다. [중앙포토]

F코드 때문에 치료 자체를 꺼리는 우울증 환자가 꽤 많다. [중앙포토]

29세 여성 A씨는 1~2년 전부터 무기력함이 이어지다 올 7월쯤 아예 밥을 굶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정신과 의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제일 먼저 "진료 기록이 남는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나이가 있다보니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기업에 취직해야 할텐데 건강진단서에 진료 정보가 나오지 않을까 지금도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정신과=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편견이 강하기 때문에 A씨에게 Z코드는 별 의미가 없었다. 편견을 줄이려는 정공법으로 가야한다는 뜻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당시 의료계 요청, 사회적 분위기 등을 감안해 Z코드를 만들었는데 사실 '눈 가리고 아웅'과 다름없다. F코드 유출을 염려하는데 절대 그럴 우려가 없다"고 말한다.
 
서울의 한 직장인(39)은 극심한 산후우울증을 앓다 견디기 힘들 정도가 돼서야 남편 몰래 병원을 찾았다. 그의 고백이다.

"처음엔 아무도 몰래, 남편도 모르게 병원에 갔어요. 어마어마하게 고민하고 긴장하면서 갔는데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진작 치료받았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항우울제, 항불안제, 잠 잘 오게 하는 약 등을 먹다가 지금은 거의 다 줄였어요." 

그는 "병원에 안갔다면, 그때 결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 살해범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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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극복과정을 담은 만화『환타스틱 우울백서』작가 서귤은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을 공개했는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나에게 공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담스러울만큼 잘해주려고 한다. 도움받을 필요가 있으면 도움 받았으면 좋다"고 말한다. 
 
우울증을 위중한 정도가 중간(B급)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도 문제다. 상급종합병원 적합여부를 평가할 때 우울증은 중간 등급으로 분류돼 있어 우울증 환자를 많이볼수록, 즉 B,C급 환자가 많을수록 불리해진다. 정성원 교수는 "우울증도 중증이 있고, 경증이 있는데 무조건 중간 등급으로 분류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이에스더·황수연·정종훈 기자 ssshin@joongang.co.kr
F코드와 Z코드
통계청의 표준질병사인분류표에 따른 정신질환 질병 코드가 F이다. F00(알츠하이머 치매)~F99(정신장애NOS)로 돼 있으며 우울증은 F32,33을 말한다. 잡다한 질병은 Z로 분류하는데, 우울증으로 상담만 받을 경우 Z71.9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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