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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위스키 위장술…책 가운데 뻥 뚫어 숨긴 '스머글러'

중앙일보 2019.10.29 11:00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40)

위스키를 취미로 가진 사람 중에 수집병에 걸린 사람이 적지 않다. 매끄러운 유리병 속에 담긴 고운 빛깔의 위스키는 가지고만 있어도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그렇게 하나둘 사다 보면, 수십 병이 되는 것도 금방이다. 그러나 이쯤 되면 가족들의 경고가 시작된다. 이제 그만 사라는 말로 시작해, 모두 마셔버리겠다, 심할 경우 다 버려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하지만 위스키 수집병은 불치병에 가까워서 도통 낫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위스키를 잘 숨길까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책장에 감쪽같이 숨은 위스키. [사진 김대영]

책장에 감쪽같이 숨은 위스키. [사진 김대영]

 
신발장이나 각종 수납장에 주로 숨기는데, 우리의 적들은 위스키 찾기에 도가 텄다. 제아무리 잘 숨겨놔도 언젠가는 들키기 마련. 궁색한 변명은 화를 부를 뿐이다. 그래서 집에 숨기길 포기하고 직장이나 개인금고 등에 보관해보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직장 내 서랍에서 위스키가 나오면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사면초가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위스키 수집 포기를 고민하는 이때, 어디선가 아군의 함성이 들려왔다. 절체절명에 빠진 우리를 구하기 위해, 위스키 증류소의 완벽한 위장술이 시작됐다.

 
위스키 증류소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거다. 중세기사 느낌 라벨이 붙은 위스키,[사진 김대영]

위스키 증류소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거다. 중세기사 느낌 라벨이 붙은 위스키,[사진 김대영]

 
18세기, 밀주 생산이 성행하던 스코틀랜드 ‘아란(Arran)’ 섬. 이곳에서 만들어진 위스키를 ‘아란 워터(Arran Water)’라 불렀다. 그러나 밀주 생산은 중단됐고, 1995년 아란 증류소가 세워지기 전까지 위스키를 만들지 못했다. 아란 증류소는 아란 섬의 밀주 제조 역사를 기념하고자 ‘스머글러(Smuggler 밀수업자)’ 시리즈 3종을 2015년부터 발매했다. 3종 각각의 이름은 ‘일리시트 스틸(Illicit Stills 밀주 생산에 쓰인 증류기), ‘하이 시즈(High Seas 공해 상에서 위스키 밀반출)’ ‘엑사이즈 맨(Excise Man 세금징수원)으로 밀주에 관여된 스토리를 풀어냈다.
 
이 위스키들은 책에 담겼다. 책 가운데를 뻥 뚫어 위스키 한 병이 들어가도록 했다. 책 커버는 마치 백과사전을 연상시킨다. 18세기 아란 섬 밀주 제조업자들이 우리에게 전수해준 완벽한 위장술이다. 다른 책들과 함께 책장에 꽂아두면, 위스키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술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거다. 혹시 들킨다 해도 핑곗거리는 있다. 책 커버를 들추면 아란 섬 밀주 시대에 대한 서술이 담겨있으니,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고 둘러대자. 책을 사니 술이 따라왔다는 말도 덧붙이면 좋다.  
 
작전 명령 대기중인 위스키 제군들. [사진 김대영]

작전 명령 대기중인 위스키 제군들. [사진 김대영]

 
라프로익은 증류소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동원했다. 20세기, 위스키 침체기에 라프로익을 지켜낸 이안 헌터. 그의 뒤를 이어 20세기 스코틀랜드 최초로 여성 증류소 오너가 된 벳시 윌리엄슨. 최근 라프로익 증류소는 두 인물의 일대기를 담은 스토리북 형태의 위스키를 발매했다. 책을 넣는 흰 케이스까지 만들어서, 더욱 술 같지 안은 매력을 뽐냈다. 그들로부터 전설적인 마법의 힘을 전수 받아, 우리의 적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까?

 
라프로익 30년 이안 헌터 스토리북1. [사진 라프로익 증류소]

라프로익 30년 이안 헌터 스토리북1. [사진 라프로익 증류소]

 
우리의 적이 이 글을 읽고, 당신의 책장을 뒤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인터스텔라' 속 대사 하나를 기억하자.

“우리는 답을 찾아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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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필진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 위스키 덕후이자 싱글몰트 위스키 블로거다. 위스키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살기도 했다. 위스키와 위스키 라벨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위스키에 대한 지식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 등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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