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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까, 컴퓨터가 삼켜버린 건축가의 상상력

중앙일보 2019.10.29 10:00

[더,오래] 손웅익의 작은집 이야기(30)

건축설계 도면을 컴퓨터로 그리게 된 건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때까지는 트레이싱지라고 하는 반투명 기름종이에 연필로 도면을 그렸다. 건축에서는 주로 HB연필을 사용했고 토목에서는 H나 2H 등 연필심이 강한 연필을 사용했다.
 
내가 처음 건축설계 사무소에 입사한 1981년도에도 연필로 도면을 그렸다. 제도판마다 연필꽂이가 있고 출근하면 먼저 연필을 깎았다. 연필은 건축설계 기사의 연장인 셈이니 정성 들여 자기가 사용하기 편한 굵기와 길이로 깎았다. 트레이싱지는 반투명이라 밑에 다른 도면을 깔고 연관된 도면작업을 하기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도면을 몇 번 고치면 구멍이 뚫리고 너덜너덜해진다. 그렇게 되면 비상조치로 투명 테이프로 보수해서 사용하곤 했다.
 
1980년대 초에는 연필로 도면을 그렸다. 연필로 그린 도면은 시간이 지나면 훼손되는 문제가 있었다. 불확실한 도면으로 인해 일조권처럼 인접대지와 예민한 사안의 경우 다툼이 많이 발생했다. [사진 pixabay]

1980년대 초에는 연필로 도면을 그렸다. 연필로 그린 도면은 시간이 지나면 훼손되는 문제가 있었다. 불확실한 도면으로 인해 일조권처럼 인접대지와 예민한 사안의 경우 다툼이 많이 발생했다. [사진 pixabay]

 
연필로 그린 도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이 뭉개지고 흐려져서 설계도면이 훼손된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이렇게 훼손된 도면은 불확실한 도면이 된다. 훼손되어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도면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테면 일조권처럼 인접대지와 예민한 사안의 경우에 인접대지 간에 다툼이 많이 발생한다.
 
일조권은 북측에 면한 인접대지로부터 신축건물이 띄워야 할 거리를 규정하고 있다. 신축 건물의 높이에 비례해서 띄우는 거리가 달라진다. 대지 크기가 작은 경우는 일조권 규정 때문에 2층, 3층 올라가면서 집이 줄어들어 급기야 상층부는 제대로 공간을 쓰기 어렵게 쪼그라들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일부 건축설계 사무소는 일조권에 유리하도록 정북 방향을 살짝 틀어버리기도 했다. 발급받은 작은 축척의 지적도를 원시적인 방법으로 확대하고 방위를 표시해 두었기 때문에 그 정밀도를 검증하기 어려웠다. 부정확하게 만들어진 도면을 건축과 공무원들이 검증하기도 불가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청사진 도면이 시공현장으로 나간다.
 
 
종이 감광지 위에 트레이싱지를 겹쳐서 조명을 쏘는 청사진 기계를 통과하면 푸른색 도면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청사진도면이다. 너덜너덜해진 트레이싱지 도면으로 만든 청사진 도면은 지저분하고 명확히 알아볼 수 없는 도면이 되기도 한다. 그런 도면이 시공현장에 나가게 되니 정밀시공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도 연필 도면 작업의 문제점은 쉽게 도면을 고칠 수가 있지만, 어느 부분이 고쳐졌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컴퓨터로 그리는 도면은 하나의 도면을 여러 가지 색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중심선은 붉은색, 콘크리트 같은 구조부위는 노란색, 마감색은 흰색, 가구는 핑크색 등으로 구분해서 표현한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느 부위의 구조가 변경될 경우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연관된 다른 도면들도 수정할 수 있다. 건축물은 건축도면뿐만 아니라 구조, 기계, 전기, 소방, 토목, 조경, 인테리어 등 여러 분야의 설계도면에 일관성이 있을 때 건축시공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수작업으로 도면을 그리던 시기에 상가주택건물을 설계한 적이 있다. 4층까지는 근린시설이고 5층은 주택이었다. 대지 크기가 작아서 주차는 기계식 2단주차기를 1층 건물 안쪽에 설치했다. 시공현장에 도면을 내보내기 직전에 건축주로부터 기둥 하나의 위치를 조금 이동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디자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아서 기둥 위치를 조정했다. 기둥이 이동되면 그에 따라 대들보에 해당하는 구조가 움직이게 된다.
 
마지막 수정되는 구조도면을 직원들이 나누어서 지우고 고쳐서 시공현장에 급히 내보냈다. 지방현장이라 공사 중에 자주 가기도 어려웠다. 준공을 앞두고 시공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 새로 뽑은 건축주의 차를 2단주차기로 올리다가 차 지붕이 왕창 찌그러졌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도면을 마우스로 그리고 자판을 두드려 그린다. 손으로 그릴 때보다 속도나 정밀도에서는 월등하지만, 건축가가 구상하는 컨셉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사진 pixabay]

요즘은 도면을 마우스로 그리고 자판을 두드려 그린다. 손으로 그릴 때보다 속도나 정밀도에서는 월등하지만, 건축가가 구상하는 컨셉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사진 pixabay]

 
도면을 확인해보니 마지막으로 기둥의 위치를 이동시키면서 2단주차기 상부로 보를 이동시켜 놓았다. 즉, 기계식 2단 주차기 상부 천장에 보가 지나가게 되어 2단 주차를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높이가 확보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차값을 물어주고 구조 일부를 철거하고 보강하는 비용까지 부담했다. 받은 설계비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었지만 최종적으로 도면점검을 제대로 하지 못한 대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모든 도면을 컴퓨터로 그린다.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로 그리고 자판을 두드려 그린다. 건축과에 들어가면 바로 캐드 작업을 배운다. 손으로 도면을 그릴 때 비해 속도나 정밀도에서 월등하다. 오차를 허용하지 않으니 시공현장에 정밀한 도면을 내보낼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건축가가 구상하는 컨셉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즉, 대부분의 건축가는 손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결국 건축가의 상상력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영역에 종속되고 무한한 디자인의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건축가는 드로잉으로 말한다’고 한 이 시대 원로 건축가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프리랜서 건축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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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웅익 손웅익 프리랜서 건축가. 수필가 필진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집, 투자와 과시의 대상으로의 집에서 벗어나 집은 살아가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건축가이자 수필가인 필자를 통해 집의 본질에 대해, 행복한 삶의 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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