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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이겨도 배상·사과 못받고···강제동원 이춘면 할머니 별세

중앙일보 2019.10.28 17:17
지난 1월 항소심 공판을 마친 이춘면 할머니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항소심 공판을 마친 이춘면 할머니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재판에서 승소하고 기자회견 할 때 반성하지 않는 일본 기업이나 아베 총리에 대해 크게 화를 내셨어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면(88) 할머니가 지난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일본 전범 기업인 후지코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중인 이 할머니는 결국 일본 기업과 정부 어디에서도 사과나 배상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소송을 도운 김진영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은 이 할머니에 대해 위와 같이 전했다.  
 

항소심 승소에도 ‘분노’…사건은 대법 계류 중

이 할머니는 13살이던 1944년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면 상급 학교에 진학시켜 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후지코시 측 거짓말에 속아 일본으로 떠났다. 설명 책자에도 ‘일본 기업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도야마시에 있는 후지코시 공장에서의 삶은 약속과는 전혀 달랐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10∼12시간씩 철을 깎거나 자르는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임금은커녕 다쳐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이 할머니는 이듬해인 1945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할머니를 비롯한 23명은 지난 2015년 5월 자신이 입은 정신적ㆍ육체적ㆍ경제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후지코시에 1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한국 법원에 냈다. 2017년 3월 1심은 후지코시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이 할머니에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후지코시 측은 이 할머니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소멸했다는 이유로 항소했지만, 지난 1월 항소심에서도 법원은 “회사 측이 1억원을 지급하라”며 1심과 같이 원고 일부승소로 판결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과 관련, 임재성·김세은 변호사가 지난 2월 도쿄(東京) 미나토(港)구에 있는 일본 기업인 후지코시 본사를 방문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후지코시 본사가 있는 건물 입구에서 경비 용역 직원들과 두 변호사(가운데 뒷모습) 및 지원단 등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과 관련, 임재성·김세은 변호사가 지난 2월 도쿄(東京) 미나토(港)구에 있는 일본 기업인 후지코시 본사를 방문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후지코시 본사가 있는 건물 입구에서 경비 용역 직원들과 두 변호사(가운데 뒷모습) 및 지원단 등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당시 승소 판결이 나왔음에도 기자회견에서 이 할머니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김 사무국장은 “지난해 신일철주금이나 미쓰비시중공업 관련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데도 일본의 사과나 배상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 할머니가 크게 화를 내셨다”며 “항소심 승소에도 불구하고 많이 속상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의 예상대로 후지코시가 불복하면서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가 현재 계류 중이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 자세히 알고 계셨다" 

김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해서도 강제징용 소송과 관련한 소식을 꾸준히 접했다고 한다. 그는 “양쪽 정부가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며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당시에 국민학교도 나오고 공부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분들이다. 뉴스나 신문을 꾸준히 보시며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알고 계셨다”고 전했다.  
 
이 할머니는 생전 슬하에 아들 2명, 딸 2명을 뒀다. 소송은 유족이 이어갈 예정이다.  
 

"다른 할머니들도 대부분 건강 악화"

김 사무국장은  “23명 할머니 중 자택에서 일상 생활이 가능하신 분은 2명뿐”이라며 “나머지 분들은 위독하시거나 요양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한편 신일철주금ㆍ미쓰비시중공업 관련해 지난해 대법원에서는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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