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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정' 등 희귀본 통해 돌아본 한국 출판 100년사

중앙일보 2019.10.28 16:26
회동서관에서 출판된 이광수의 '무정'(1924). [사진 삼성출판박물관]

회동서관에서 출판된 이광수의 '무정'(1924). [사진 삼성출판박물관]

한국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을 처음 펴낸 출판사는 어딜까. 기록에 따르면, 『무정』은 1918년 신문관(인쇄소)·동양서원(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다. 당시는 인쇄소가 출판사를 겸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후 『무정』은 회동서관·흥문당서점 등 여러 인쇄소·출판사를 거쳐 1953년 박문출판사까지 총 9판이 출판됐다. 이 판본들 대부분은 소실됐고, 회동서관에서 찍어낸 5판은 단 한 권만 남아 있다.
 
회동서관에서 펴낸 『무정』 5판 등 희귀본을 직접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삼성출판박물관이 기획전 '책을 펴내다-우리 근현대 출판사 100년'을 오는 12월 10일까지 연다. 근현대 출판의 태동기인 1880년대부터 해방 전후, 출판 전성기인 1970년대 후반까지 국내에서 출간된 책 110여점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책이 아니라 책을 만든 출판사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은 "출판의 역사는 곧 출판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난 100여년간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원고 검열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출판사들은 꾸준히 책을 내왔다"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우리 근현대 출판의 다양한 풍경을 출판사별로 조감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책을 펴내다' 전시장 전경. [사진 삼성출판박물관]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책을 펴내다' 전시장 전경. [사진 삼성출판박물관]

 
우리나라의 근대적 출판은 1883년 정부에서 신문이나 도서를 출판하기 위해 박문국을 설치하고 신식 연활자와 인쇄 기계를 도입한 것이 계기가 됐다. 1884년에는 최초 민간 출판사와 근대식 민간 인쇄소를 겸한 광인사가 설립됐다. 이후 박문사, 신문관, 문아당, 보성사 등 인쇄소를 겸한 출판사들이 생겨났다. 
 
첫 번째 전시는 근현대 출판의 태동부터 해방 전까지 시기다. 전시장에는 고대소설을 제외한 모든 출판물에 인세를 지불한 최초의 출판사인 회동서관을 비롯한 광학서포, 박문서관, 신문관, 동양서원 등 근현대 초기에 설립된 대표적 출판사들의 출판물이 전시돼 있다. 
회동서관이 펴낸 지석영의 『자전석요』(1909). 이 책은 근대적 체제를 갖춘 최초의 한자 자전으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사진 삼성출판박물관]

회동서관이 펴낸 지석영의 『자전석요』(1909). 이 책은 근대적 체제를 갖춘 최초의 한자 자전으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사진 삼성출판박물관]

 
전시장에선 회동서관이 펴낸 이광수의 『무정』(1924)뿐 아니라 지석영의 『자전석요』(1909)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자전석요』는 근대적 체제를 갖춘 최초의 한자 자전으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월북 한글학자인 김두봉의 『깁더 조선말본』(1914)도 전시됐으며 신문관에서 출간한 육당 최남선의 『육전소설』(1913), 박문서관이 펴낸 홍난파가 번역한 빅토르 위고의 『애사』(1922) 등도 만나볼 수 있다. 
  
박문관서가 펴낸 홍난파가 번역한 빅토르 위고의 『애사』(1922)도 만나볼 수 있다. [사진 삼성출판박물관]

박문관서가 펴낸 홍난파가 번역한 빅토르 위고의 『애사』(1922)도 만나볼 수 있다. [사진 삼성출판박물관]

두 번째 전시 주제는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이다. 을유문화사, 민중서관, 계몽사, 사상계사, 어문각, 신태양사 같은 출판사들이 펴낸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 근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출판사들은 해방 이후 혹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설립된 대표적인 곳들이다.
 
광복 이후에는 종이가 귀해 교과서 외의 책을 만들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표정훈 평론가는 "8.15 광복 이후 1945년 말까지 45개 출판사가 군정 당국에 새로 등록했는데, 종이 조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종이는 일본인이 버리고 간 조선양지배급회사 창고에 쌓인 것이 전부였다"며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 가장 급했고 다음으로 신문용지에 배정되고 남은 종이가 출판사 몫이었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 전시는 고도성장ㆍ산업화시대의 지식보급과 비판의식이 성립된 시기로 ‘1960년대, 오늘날 우리 출판의 뿌리가 된 시기’를 주제로 한다. 1960~70년대는 출판의 전성시대로 통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민음사, 범우사, 샘터사, 한길사, 문학과지성사 같은 출판사들이 펴낸 안톤 슈낙의 번역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영자의 전성시대』 『사람의 아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다양한 작품들이 나왔다.
 
김종규 관장은 "전 세계적으로 출판산업이 불황이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출판사들이 처한 현실이 유리하고 좋았던 적은 없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많은 출판사에 바치는 헌사라도 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어 "출판사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책을 펴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출판은 그 명맥을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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