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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피에 젖은 경계선

중앙일보 2019.10.28 00:37 종합 35면 지면보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터키 동부 국경 도시 카르스(Kars)로 가는 길은 멀었다. 이슬람의 신비를 간직한 도시 카르스는 오르한 파묵이 쓴 소설 『눈』의 무대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넌 버스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지대를 한나절 달렸다. 지평선 위로 카라반 숙소인 세라이가 가끔 스쳤다. 해질 무렵 도착한 카르스는 모래 바람에 잠겨 있었다. 흙담 위에 켜진 가스등이 희미하게 길을 비췄을 뿐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타고 낙타 울음소리가 들렸다.
 

국경선에 걸쳐 사는 쿠르드족
강대국이 외면한 백년의 혈투
헛된 대북 구애 집착하는 한국
흔들리는 동맹, 국경선 안녕한가

여장을 푼 호텔 레스토랑에서 조촐한 악단이 노래를 불렀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위스크다라(Uska Dara). 보스포러스 해협 동쪽 마을 처녀가 이스탄불로 이주한 연인을 그리는 노래다. 한강 정도의 폭일뿐인 그 해협은 동서 문명의 경계선이다. 문명 간 갈라진 애틋한 사랑, 민요가 될 법하다. 그런데 그 악단은 터키족이 아닌 쿠르드족이었다. 늦은 오후 잠시 들른 마을에서 만난 유랑민족. 거기에서 카르스까지 인종은 쿠르드족으로 바뀌었다. 터키 인구의 20%, 그러나 위험한 변경에서 살아가는 비운의 민족이다. 카르스에서 산을 넘으면 이라크 국경이 있는데 거기에 6백만 동포가 산다. 위스크다라가 아니라 산 너머 이산 혈족을 그리는 쿠르드 민요여야 했다. 야란 (Yaran, 내 사랑). “야란 야란 살아있는지 보여 다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몸과 마음의 고통이 녹아내릴 거야.”
 
쿠르드족은 이 노래를 울음과 함께 삼킨다. 이 노래를 불렀다간 집과 가족을 잃는다. 아니 국경너머 야란을 부를까봐 터키군은 쿠르드 자치정부 수도 코바니를 공습했다. 분리 독립 의지를 괴멸하려는 군사작전명은 “평화의 샘”. 쿠르드 민병대 340여명이 전사했고, 피난민 7만여 명이 시리아로 향했다. 쿠르드민병대(YPG)가 이슬람 극단조직 IS와 생사를 걸고 싸운 것은 국경선 위에 국가를 수립하려는 민족의 절규였다. IS를 내쫓은 그들을 터키가 내쫓았다. 갈곳은 없다. 시아파 이란은 미국의 적대국, 수니파 이라크 북부엔 IS가 여전히 활약 중이다.
 
여성과 노인까지 총을 들고 IS를 격퇴한 공로는 사막 위 희미한 국경선을 사수하는 중동국가의 위험한 민족주의로 소멸됐다. 그 국경선은 1차 대전 직후 강대국이 지도 위에 임의로 그은 상상의 경계선일 뿐이어서 백년 동안 적대와 증오를 뿜어냈다. 종교, 인종, 석유 자원이 뒤엉킨 땅에 미국과 러시아의 패권전이 숨 가쁘게 전개된 곳에서 전쟁은 오히려 일상이었다. 전쟁은 독재를 불러왔고, 인접국과 타인종에 대한 학살과 파괴가 멈추지 않았다. 국제기구도, 세계 지성과 유엔평화군도 ‘피에 젖은 경계선’에 위태롭게 올라 앉아 야란을 부르는 4천만 민족을 구출하지 못했다. 종교적 적대와 극단적 민족주의가 작동하는 한 쿠르드족의 유랑과 핍박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국경선은 안녕한가? 한(韓)민족의 안위를 보장하던 국경선은 아시아에서 유례없이 안전한 천연의 요새였다. 북쪽엔 강, 삼안(三岸)은 바다였으니 말이다. 두만강이 곳곳에 여울을 품었다 해도 간도 지역엔 인적이 드물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평화를 누렸던 이유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국경선은 곧 제국 침략의 야만과 내전의 유혈로 물들여졌다. 두 개의 국경선이 생겨났다. 대한해협에 그어진 역사 단층선, 휴전선에 그어진 군사경계선이 그것이다. 강대국의 화염이 충돌하는 위태로운 군사 경계선과, 혈맹의 짝짓기를 교란하는 민족 감정의 단층선 안에 한국이 갇혀 있다. 군사 장벽이 낮아지면 역사 대립이 높아지고, 역으로 대한해협에 화해 무드가 깃들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다. 딜레마다. 이 역설에 포획된 한국이 쿠르드족보다 안전하다 할 수 있을까.
 
지난 22일 아침, 블라디보스톡에서 발진한 러시아 조기경보기가 울릉도 상공을 잠입 비행했다. 곧 이어 전투기 3대가 삼안을 한 바퀴 돌고 유유히 귀환했다. 중국 전투기가 대한해협을 정찰하고, 일본 초계기와 광개토왕함 간에 근접 비행과 레이더 조준 시비가 불거진 것이 불과 한 달 전 일이었다. 성주의 사드포대가 긴장했다. 한국의 방공식별구역은 21세기 신제국들이 상대의 진의를 염탐하는 놀이터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터키군과 쿠르드 민병대가 ‘그냥 싸우게 놔두라’고 남 얘기하듯 말했다. 한일 역사분쟁에 결코 끼기 싫은 미국이 한국정부의 견미(睊美, 흘겨봄) 태도에 화가 치밀어 ‘글로벌 망토’를 쉽게 벗어던지지는 않겠지만, ‘결미(結美), 연일(聯日)’을 교두보로 친아.중(親俄中)을 꾀해야 하는 민족 안위 전선에 적색등이 켜진 것을 모르는 건 정작 한국인이다.
 
핵을 숨긴 김정은이 금강산에서 말했다. ‘저 너절한 건물들을 쓸어버리라’고. 현정권의 애절한 구애가 그 한마디로 뭉개졌다. 아니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떠났는데,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고 믿고 싶은 사랑의 노래는 홀로 남은 여인 주변을 맴돈다. 『눈』의 주인공 케림이 카르스를 떠나는 기차역에서 이슬람 순례자가 된 연인을 헛되이 기다렸듯이 말이다. 대체, 우리의 국경선은 안녕한가?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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