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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실리콘 밸리에는 출퇴근 시간 없다”는 장병규 보고서

중앙일보 2019.10.28 00:29 종합 34면 지면보기
“실리콘 밸리에서 출퇴근 시간을 확인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 장병규 위원장의 직격 토로였다. 지난 25일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180쪽 분량의 ‘4차산업혁명 대정부 권고안’을 언론에 설명하는 자리에서다. 장 위원장은 “주 52시간 근무제의 일률적 적용이 개인이 일할 수 있는 권리까지 막고 있다”며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국가가 일할 권리 빼앗아간다고 지적
정치권이 못하던 ‘고양이 방울’ 달아
경제활성화 위한 쓴소리 받아들이길

그의 주장은 지금 경제 비상상황이 아니면 보기 힘든 1%대 경제 성장률의 늪으로 빠져든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인재는 시간이 아닌 성과로 평가받고, 도전을 통해 차별화된 가치를 창출한다. 특히 초기 벤처기업인 스타트업에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주 52시간을 훌쩍 넘겨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일할 권리를 국가가 빼앗아 가고 있다. 다양화하는 노동 형태를 포용하기 위해서라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국가가 일할 권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는 주장은 52시간제를 강행한 현 정부에는 뼈 아픈 대목이다. 근로기간을 줄이고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자는 선의의 취지로 52시간제를 강행했지만 부정적 여파가 경제 전체를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소득이 줄어 힘들고, 기업은 치열한 국제 경쟁에 대응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 됐다.
 
장 위원장 설명대로 페이스북·구글 같은 미국의 거대 플랫폼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낸 실리콘 밸리에는 근로시간 제한이 없다. 놀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사무실로 돌아와 밤을 새우며 프로그래밍을 하고 제품을 개발한다. 미국 경제의 저력이다. 알리바바·텐센트·화웨이 같은 중국 기업들도 근로자들이 일하고 싶을 때는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장 위원장은 탁상행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게임회사 크래프톤을 창업한 당사자로서 기업 현장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한다. “게임산업만 봐도 한국이 중국에 밀리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있다. 여기서 밀리면 엄청난 일자리가 사라진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주 52시간 근무를 비롯한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
 
권고안은 4차산업혁명에 성공하려면 대학 자율성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등록금 자율화 등 자율권을 인정해야 대학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면서다. 등록금 동결 역시 가계부담을 덜어주는 ‘착한 정책’이지만 10년째 대학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권고안은 바위처럼 굳은 정부 역할의 변화도 촉구했다. 그러면서 ‘스마트 시티’를 예로 들었다. 이 분야 역시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로 떠올랐지만 정부가 틀어쥐면서 시장 창출에 실패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200년 된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만큼의 속도로 세상이 바뀌는데도 정부가 규제를 틀어쥐면서 기업 활동을 가로막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8일 문 대통령은 이 권고안을 보고받았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권고안은 9개월간 각 분야 전문가 100여 명이 100차례 논의 끝에 만들어졌다. 즉각 받아들여져 경제 활성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장 위원장은 “정치권 누구도 쉽게 달 수 없는 ‘고양이 목의 방울’을 꺼내든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뿐 아니라 국회도 그의 절절한 호소를 귀담아 듣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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