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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북한의 위협 애써 외면해 무엇을 얻었나

중앙일보 2019.10.28 00:22 종합 30면 지면보기
정재홍 콘텐트제작에디터·논설위원

정재홍 콘텐트제작에디터·논설위원

바둑에서 초반에 돌을 놓을 때 대개 모퉁이에 둔다. 모퉁이는 두 면만 이으면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집을 만들려면 네 면을 모두 이어야 해 집 짓기가 훨씬 어렵다. 프로 기사들의 경기를 보면 실리 위주의 바둑이 대세다. 든든한 실리를 확보한 기사가 결국 집 싸움에서 승리한다. 실리를 중시하는 바둑의 금과옥조가 ‘내가 먼저 산 뒤에 상대를 잡으러 가야 한다’(我生然後殺他) 이다. 내 집이 불안한 상태에서 상대의 집을 잡으러 갔다가는 상대도 못 잡고 내 집도 무너지는 곤경에 빠질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보면 바둑의 격언과는 거리가 멀다. 일부러 실리를 외면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급속한 최저임금 인상과 성급한 주 52시간제 실시로 경제 활력이 떨어지며 올해 성장률은 2%를 밑돌 전망이다.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한전은 올 상반기에만 9285억원의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던 한국의 원자력 기술은 원전 생태계가 무너지며 재건이 힘든 상황이 됐다. 문 대통령은 조국 사태에서 국민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을 방치해 진보·보수 간 갈등을 깊게 했다.
 
현 정부 정책 중 가장 실속 없는 분야가 대북 정책이다. 북한이 한국을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하며, 문 대통령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든 말로 비난해도 정부는 북한을 감싼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5일 평양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남북전이 무관중·무중계로 치러졌음에도 정부는 북한에 대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다. 문 대통령은 3일 뒤 가진 주한 외교단 초청 리셉션에서 “평창으로 모아주신 평화와 화합의 열기가 2032년 서울·평양 올림픽까지 계속되도록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지지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평양 경기로 북한에 대한 여론이 싸늘해진 상황이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승-전-북한을 외치는 현 정부는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의지를 가진 만큼 결국 비핵화가 이루어져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저서 『군인과 국가』에서 “군인은 상대의 의도보다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도는 본질상 정치적이고 변하기 쉬워 올바로 평가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고 갈파했다.
 
대통령은 국군 최고 통수권자이다. 김정은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의 능력이다. 북한은 한국을 초토화할 수 있는 핵무기를 수십 기 갖고 있고, 지속해서 미사일 도발을 하며, 휴전선 부근에는 수도권을 타격할 수 있는 장사정포를 배치해 놓았다. 이 명백한 사실에 기초해서 북한에 대응하는 건 대통령의 의무다. 국민은 정부의 대화 요구를 문전박대하는 북한에 끌려다니며 대화에 목매는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다. 대화의 문은 열어 놓되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비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에 따르면 2006년 6자회담이 교착되고 앞길이 막히자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도 자체 핵연료 주기를 갖출 수밖에 없다”면서 검토를 지시했다(중앙일보 10월 18일자 27면 ‘송민순의 한반도평화워치’). 우라늄 광석 채굴과 정련·가공, 원자로 운용 및 재처리 등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자체 핵연료 주기를 가지면 핵무기 제조 능력을 지닐 수 있다. 송 전 장관은 “전쟁은 끝났다는 감성적 판단으로는 나라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며 “우리의 핵 정책을 재검토하는 등 한반도 비상상황을 상정한 군사 태세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재홍 콘텐트제작에디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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