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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와 친분 깊어서” 해임⇒강등 수위 낮춰…‘솜방망이’ 性비위 소청심사

중앙일보 2019.10.27 09:00
성 비위로 처벌 받은 지방직 공무원들이 시도 소청심사위원회 소청을 통해 최종 징계 수위를 낮추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중앙포토]

성 비위로 처벌 받은 지방직 공무원들이 시도 소청심사위원회 소청을 통해 최종 징계 수위를 낮추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중앙포토]

#1. 대구시에 근무하는 지방직 공무원 A씨는 부하 여직원에게 ‘사타구니가 가려워 자주 긁는다’고 말하는 등 약 10개월간 성희롱을 한 혐의로 정직 2개월(보수의 3분의 2 감액)이라는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올해 대구시 소청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해 경징계인 감봉 3개월(보수의 3분의 1 감액)로 징계 수위를 낮출 수 있었다. 소청위원들은 A씨의 언행이 경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성적 동기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최근 6년간 17개 시도 성비위 징계 공무원
173명 중 60명 처벌 수위 낮춰…비율 34.7%
권미혁 의원 “소청위가 위법한 질서 세워”

#2. 서울시 소속 B동장은 함께 사진을 찍을 때 갑자기 얼굴을 돌려 피해자의 볼에 입맞춤하고, 워크숍 중에는 ‘잠자는 모습도 예쁘다’고 말해 피해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매점에서 한 입 베어 먹은 핫바를 피해자에게 먹으라고 건네주는 등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 사실도 있었다. B동장은 해임 처분을 받았지만 소청을 통해 강등으로 무마됐다. 계급이 1단계 내려가고, 3개월간 보수의 3분의 2가 줄어들지만 공무원직은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B동장이 피해자가 친분이 깊었으며, 지금까지 징계 전력이 없다는 게 감경 사유였다. 
 
성(性) 비위로 징계받은 지방직 공무원 10명 중 3명 이상이 시·도 소청심사위원회를 구제 또는 징계를 경감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직 공무원에 대한 성 비위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권미혁 의원이 26일 17개 시·도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올해 8월까지 성폭력·성희롱 등으로 징계를 받은 지방직 공무원 중 173명이 소청을 제기해 60명이 감경 처분을 받았다. 감경 비율은 34.7%였다. 시·도 소청심사위는 지방직 공무원의 징계를 재심하는 기구다.
 
지난 6월 13일 울산시 북구청 프레스센터에서 전국공무원노조 울산지역본부 북구지부와 울산여성연대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여성 공무원을 성희롱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북구 고위 공무원에 대한 성희롱·성폭력 고충심의위원회의 재심의를 촉구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13일 울산시 북구청 프레스센터에서 전국공무원노조 울산지역본부 북구지부와 울산여성연대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여성 공무원을 성희롱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북구 고위 공무원에 대한 성희롱·성폭력 고충심의위원회의 재심의를 촉구했다. [연합뉴스]

이 중에는 감경 사유가 석연치 않은 사례가 다수였다. 경기도 소속 공무원 C씨는 업무상 알게 된 여성의 옷에 이물질이 묻었다며 가슴과 허벅지를 만졌다가 해임됐지만 소청을 통해 최종적으로 강등 처벌을 받았다. “피해자가 공무원 C씨의 요구에 응해 함께 시간을 보내서 원인을 제공한 부분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대구시의 A씨는 “가해자의 성적 의도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징계 수위를 낮췄다. 서울시의 B동장도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라는 사유로 구제받았다.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거나, 가해 행위를 비호하는 방식으로 심사가 이뤄진 것이다.  
  
특히 서울시에서는 47명이 소청을 제기해 19명(40.4%)이 징계 수위를 낮췄다. 세종시(57.1%)나 경상북도(42.9%) 등도 감경 비율이 높았다.
 
중앙노동위원회가 배포한 ‘직장 내 성희롱 판례 분석’에 따르면 성희롱 징계를 판단할 때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감경 사유가 될 수 없다’ ‘언어적 성희롱이어도 위법이 낮다고 볼 수 없다’고 제시하고 있다. 
 
권미혁 의원은 “시·도 소청심사위가 위법한 질서를 세우고 있는 셈”이라며 “(시·도 소청심사위에 대한) 감시 절차나 기구가 없기 때문에 불합리한 감경이 이뤄졌다. 피해자 구제 절차는 온데간데없이 가해자를 옹호하는 결과만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주무 부처인 행전안전부가 전면적인 소청심사 제도 개편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이상재 기자 lee.sangja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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