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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시대 사헌부를 다뤘던 SBS 드라마 '해치'의 한 장면  [자료=SBS]

조선 영조시대 사헌부를 다뤘던 SBS 드라마 '해치'의 한 장면 [자료=SBS]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이은과 집의(執義) 이유희, 장령(掌令) 강종덕ㆍ정지당, 지평(持平) 김익렴ㆍ금유를 의금부에 보내고 교지(敎旨)를 내렸다… 민무회와 염치용 등이 노비의 일로 인하여 불충한 말을 떠들었기 때문에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더니 조율하여 아뢰기를, ‘대역(大逆)으로 논죄하도록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헌부는 그 죄를 청하지 아니하였으니 낱낱이 국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태종실록』 15년 5월 4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사헌부(司憲府])는 지금의 검찰에 해당하는 기관입니다. 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이니 검찰총장, 집의는 그 다음으로 대검 차장 정도되는 직위이죠. 장령과 지평은 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라고 할까요.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비리를 단속하는 사헌부의 지휘부가 모두 끌려간 초유의 사건엔 당시 정치적 배경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사헌부와 의금부의 미묘한 관계 

조선시대에는 사헌부, 의금부, 포도청, 형조 등 다양한 사법 관련 기관이 있었습니다.  
 
이중 핵심은 사헌부와 의금부(義禁府)였습니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범죄와 부정부패를 주로 다뤘으므로 요즘으로 치면 검찰에 감사원의 기능을 일부 더한 기관입니다. 
 
의금부는 왕명에 따라 반역이나 왕실 관련 사건 등 일반 수사기관이 접근하기 어렵거나 중대한 범죄를 다루는 특수기구였습니다. 사극에서 역적이나 왕실 인사에게 사약을 들고가는 관원이 주로 금부도사인데, 바로 의금부의 도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위에서 보듯 의금부는 때에 따라 사헌부를 직접 수사하기도 했습니다. 왕실을 다룬다는 점에서나 수사기관 위의 수사기관이라는 점에서나 지금 논의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비슷한 부분이 있지요.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박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장면. 역적이나 왕실 인사에게 사약을 가져가는 것은 주로 의금부의 금부도사가 맡았다. [자료=SBS]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박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장면. 역적이나 왕실 인사에게 사약을 가져가는 것은 주로 의금부의 금부도사가 맡았다. [자료=SBS]

양 기관의 관계는 미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업무 범위도 일부 겹치는 데다 서로 견제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죠. 

 
예컨대 태종은 사헌부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사건은 신문고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게 했는데, 신문고를 설치한 곳이 바로 의금부의 당직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헌부의 부실수사나 은폐 등이 확인되면 의금부에서 이첩해가는 식이었습니다. 
 
실제로 조선 세조 때 홍윤성이라는 공신이 말단 군인의 딸과 강제로 혼인하려고 행패를 부렸는데 사헌부에서 신고를 받고도 이를 처리하지 않고 심지어 일부 사헌부 관원이 홍윤성의 집에 왕래하는 것이 밝혀져 큰 사건으로 비화한 적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의금부에서 이 문제를 다루도록 하고 사헌부의 지휘 라인을 모두 조사하게 했습니다. 
 
조선 후기 화가 김준근의 '곤장' [중앙포토]

조선 후기 화가 김준근의 '곤장' [중앙포토]

 
한편으로 사헌부는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언론의 기능도 갖춰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따라서 사헌부가 신권을 상징한다면 왕명을 받아 특수수사를 담당하고 사헌부를 견제한 의금부는 왕권을 상징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왕권과 신권의 저울이 움직일 때마다 양측의 운명도 출렁이곤 했습니다. 

 

왕권 강화에 기여한 의금부 
의금부를 만든 건 태종입니다. 태종은 1414년 이전에 있던 순금사(巡禁司)라는 기구를 의금부로 개편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으로 바꾼 것처럼 기존 기구의 명칭을 바꿀 때는 정치적 고려가 작용합니다. 태종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에 협조하지 않는 관료세력을 억누르는데 의금부를 요긴하게 활용했습니다. 

 
태종 15년 사헌부 고위 간부들이 의금부에 끌려간 것은 민무회 사건 처리에 대한 태종의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민무회는 태종(이방원)의 처남입니다. 고려 말 변방에서 신흥세력으로 올라선 이성계 집안의 이방원은 유력 가문이던 처가 여흥 민씨의 덕을 많이 봤습니다. 왕위 계승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여흥 민씨의 재력과 사병 집단이 든든한 배경이 됐습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뒤엔 강력한 외척 세력인 이들에게 적잖은 부담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결국 처남 네 명을 모두 처형하긴 합니다만, 막무가내로 할 수는 없었고 사법적 절차를 밟아 정당성을 갖추고 싶었던 것이 태종의 마음이었죠.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 [자료=SBS]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 [자료=SBS]

그런데 문제는 사헌부가 순순히 이에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태종은 그 불편한 심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사헌부가) 아뢴 조목 안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상서하여 어떤 자는 자기의 죄를 모면하기를 엿보고, 어떤 자는 자기의 욕심을 이루려고 도모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누구를 위하여 발설한 것이고, 한편으로 치우쳐서 신하로서의 충의(忠義)가 없기 때문이다.”
 
즉, 사헌부는 민무회에게 씌워진 혐의가 모함의 가능성이 있다고 봤던 것이죠. 당시 미묘한 정치적 배경을 참작해 사헌부는 신중하게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사건 직후 의금부에서 이를 ‘대역’이라고 규정했던 것과도 배치됩니다. 어쨌든 사실여부를 떠나 사헌부의 태도는 외척 세력 척결이라는 태종의 구상을 방해하는 일종의 검란(檢亂)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의금부가 사헌부 핵심인사를 모두 압송한 것은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주요 대신들에게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는데, 당시 발언을 보면 사헌부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적상산사고본 『태종실록』 [자료=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적상산사고본 『태종실록』 [자료=문화재청]

“내 진실로 그들의 간사한 마음가짐을 더럽게 여겼으나, 꾹 참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끝까지 참을 수 없어서 지금 옥에 내려 다스리는 것뿐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군신(君臣)의 예절이 있는 나라라고 일컬어 오는 터에 사헌부에서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어찌 기강을 바로잡는 권력을 가지고서도 이같이 하는가? 우리나라의 기강이 가소로울 뿐이다.”(『태종실록』15년 5월 4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태종과 사헌부의 악연  
태종과 사헌부의 악연은 오래 이어졌습니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뒤 상왕이 되어서도 병권을 쥐었던 태종은 군사훈련을 하려다가 사헌부의 제지를 받았는데, 이때도 모두 의금부로 끌고 갔습니다.
 
“상왕(태종)이 대사헌 홍여방, 장령 송인산, 지평 허척을 의금부에 하옥해 국문하게 하며 말하기를, ‘단지 군사 백 명을 거느리고 빈 땅에서 3, 4일간 훈련하는 것인데 홍여방 등이 ‘때마침 가뭄이 심하므로 밤이나 낮이나 진념하셔야 할 것인데, 거둥(擧動·임금의 나들이)하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일이라’ 며 주상(세종)에게 고해 금지시키라 했으니 모두 다 당치도 않은 일이다. 국문해서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 2년 4월 23일)  
 
황희 영정 [중앙포토]

황희 영정 [중앙포토]

이런 배경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세종 시대엔 사헌부 관료들의 비리가 심심치않게 적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료의 모범이라 불렸던 황희도 예외는 아닙니다.
 
“황희는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서자였다. 김익정과 서로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승려 설우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黃金)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 10년 6월 25일)
 
훗날 태종의 손자인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의금부의 본부를 한성 중부 견평방,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 종로구 종로1가 44번지에 두었습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사육신 중 한 명이었던 성삼문을 옹호한 정보라는 관료의 가산을 몰수하고 그가 살던 집을 본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역시 왕권 강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특별사법기관인 의금부의 평면도 [중앙포토]

조선시대 특별사법기관인 의금부의 평면도 [중앙포토]

  
사헌부의 반격  
사헌부는 관료들을 감찰하고 왕에게 직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간원, 홍문관과 함께 조선 사대부가 가장 선망하는 요직으로 불렸습니다. 그런 만큼 사헌부에 소속된 관원들은 자부심이 높았습니다. 태종 시대에 의금부에 의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어도 왕명에 호락호락 순응하지 않는 '반골' 기질은 쭉 이어졌습니다. 
 
“어느 날 궁녀가 죄가 있어 임금(세종)이 직접 대사헌 조박에게 명하여 죽이게 했다. 하지만 사헌부 잡단(雜端) 안순은 ‘헌부(憲府)는 법을 잡고 있는 기관이지 사람을 형벌하는 관청은 아닙니다. 또 그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불가합니다’하고 말했다. 조박이 ‘성상의 어명이오’라고 했지만 안순은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것이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알지 못하고 극형에 두는 것은 의(義)에 있어 어떻겠습니까. 마땅히 조사해서 그 죄를 밝히십시오.” (『세종실록』 세종 22년 11월 28일)  
 
영화 '궁녀'의 한 장면

영화 '궁녀'의 한 장면

또, 왕권이 일시적으로 약화했던 단종 때는 의금부에 대한 반격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근신(近臣)이 권세를 희롱하는 버릇을 막고, 곧은 선비가 과감하게 말하는 기상을 진작하소서. 의금부는 언관(言官)이 그 의논을 고집하면 ‘제서유위(制書有違ㆍ왕의 명을 어김)’라 하고 충분히 절실한 간언도 ‘난언(亂言)’이라고 하여, 죄명을 짜내고 언로(言路)를 굳게 막고 있습니다. 이는 후세에 보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의금부 관리의 죄 또한 작지 아니하니, 또한 파출하여 공도(公道)를 밝게 하소서.” (『단종실록』 단종 2년 11월 1일)  
  
 
의금부의 세상이 된 연산군 시대 
이런 사헌부였던만큼 왕권의 극단적 강화를 꾀했던 연산군 시대를 곱게 지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연산군은 자신의 실정을 사헌부가 비판하자 대사헌을 의금부에 투옥하는가 하면 사헌부의 일부 관직을 아예 없애 사헌부를 약화시켰습니다. 
 
반면 의금부의 당직청은 밀위청(密威廳)으로 바꿔 확대 개편하고 이곳에서 다루는 사건은 반드시 주요 정승과 승지(비서실)가 참여하게 하는 등 권위와 기능을 강화시켰습니다. 당시를 실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 [중앙포토]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 [중앙포토]

 
“(연산군은) 조종(祖宗)들의 옛 제도를 모두 고쳐 혼란케 하였는데, 먼저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하고 또 사헌부의 지평을 없애 언로(言路)를 막았다.…심지어 의금부 당직청(當直廳)이 협소하다 하여 이내 복야청(僕射廳)으로 옮겨 넓히되 밀위청이라 하고 감옥의 관원을 더 두었으며, 죄수를 신문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공(三公)과 승지ㆍ금부 당상이 섞여 다스리게 했다. 사대부로서 매를 맞는 자가 없는 날이 없었으나 모두 그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또 비방하는 의논이나 우어(偶語)를 금하는 법을 만들어 감찰로 하여금 날마다 방방곡곡을 사찰하였다가 초하루 보름으로 아뢰게 했다…” (『연산군일기』12년 9월 2일)
 
중종 반정이 일어났을 때 “(반정군이) 무사를 의금부의 밀위청에 보내, 죄수를 석방하여 모두 군대에 들어가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밀위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갇혀 있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이들이 모두 반군의 군사가 됐으니 어찌 보면 연산군은 제 발등을 찍은 셈이 됐습니다.
  
현장풀)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와 대표자들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의원식당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나경원 자유한국당,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여야는 이날 회의에서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사법개혁 법안과 정치개혁 법안 중에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법안 2건과 형사소송법·검찰청법 개정안 등 사법개혁 법안을 먼저 논의할 예정이다. 변선구 기자

현장풀)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와 대표자들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의원식당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나경원 자유한국당,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여야는 이날 회의에서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사법개혁 법안과 정치개혁 법안 중에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법안 2건과 형사소송법·검찰청법 개정안 등 사법개혁 법안을 먼저 논의할 예정이다. 변선구 기자

조선 시대 왕권 강화나 정치적 환경에 따라 의금부와 사헌부의 알력과 갈등이 벌어지고 했던 것은 마치 공수처 설치를 놓고 여야, 청와대와 검찰이 직면한 갈등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갈등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공수처장의 임명권입니다. 여당에서 추진하는 공수처 설치법에선 대통령이 공수처장을 임명하게 되어 있는데 야당 측에선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우려합니다. 권은희 바른미래당 의원은 국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하는 대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최근 『금오헌록(金吾憲錄)』이라는 의금부 관리가 남긴 서적이 발견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끈 적이 있습니다. 
의금부는 통상 당상관 4인과 낭청 10인으로 구성됐는데 당상관은 고위 관료로서 겸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낭청 10인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오헌록(金吾憲錄)』을 보면 수석 낭청인 상경력(上經歷)은 관원들의 투표로 선출했다고 합니다. 후보자들을 종이에 써서 병풍 안 책상 위에 둔 후 나머지 관원들이 후보자의 이름 아래 먹으로 점을 찍는 방식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왕명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었지만 나름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려 애썼던 흔적이 아니었을까요.
 
※이 기사는 김진옥 『의금부의 청헌, 금오헌록』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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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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