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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광화문 광장이라는 방

중앙일보 2019.10.25 00:50 종합 35면 지면보기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룸살롱과 방석집. 조명은 어둡고 분위기는 질펀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로 정치인·기업인이 빠지지 않고 검사·언론인이 끼어든다. 대사는 음흉하고 거래는 은밀하다. 주목할 단어가 룸과 방이다. 저 단어 ‘룸’을 번역하면 ‘방’이 나온다. 그런데 출생지 다른 두 단어 사이에는 결국 물리적·문화적 차이가 놓여있다. 룸살롱과 방석집이 음흉하게 같으면서 은밀하게 다른 밀실인 것처럼.
 

서양 광장과 다른 우리의 공간
자동차와 보행인의 구분 문제
유연한 방에서 얻는 대안
다음 세대의 꿈이 펼쳐질 공간

룸이건 방이건 위가 덮여있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다른 건 벽과 바닥이다. 룸을 규정하는 요소는 벽이다. 그래서 룸에 들어서려면 벽에 달린 그것, 문을 열어야 한다. 이에 비해 방은 바닥면으로 규정된다. 심지어 벽은 없어도 된다. 원두막·대청마루를 생각해보면 된다. 방에 들어서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앉는다. 그러면 방이다.
 
문화적 차이도 있다. 룸은 기능적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베드룸·리빙룸처럼 용도가 앞에 붙어 룸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이 용도를 위해서 침대·소파 같은 가구가 필요하다. ‘룸’의 번역으로는 ‘실’이 더 가깝다. 침실·거실처럼.
 
이에 비해 방은 용도가 아니고 관계와 위계로 규정된다. 호칭이 존재다. 안방·사랑방·아들방·막내방은 인간의 관계규정이고 건넌방·문간방은 공간의 위계규정이다. 가구는 중요하지 않다. 이불 깔면 침실, 방석 놓으면 거실이다. 밥상도 들어오고 술상도 펼쳐진다. 그래서 우리는 용도가 아니라 인격호칭을 붙여 방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장실’은 존재하나 ‘사장님실’은 그른 말이고 ‘사장방’은 이상해도 ‘사장님방’은 자연스럽다.
 
화류계 경험이 증언하노니 룸살롱 풍경은 다 비슷하고 방석집은 죄 다르더라. 방은 룸보다 유연하고 다양하다. 한국인은 아무 데나 돗자리 하나 깔고 신발 벗고 올라앉아 그 공간을 방으로 규정하는 유연한 문화를 갖고 있다. 심지어 팔걸이 달린 의자에도 필사적으로 책상다리하고 올라앉는다.
 
그런데 전대미문의 거대한 방이 갑자기 등장했다. 붉은 옷을 입은 새로운 세대들이 벽도 천장도 없는 길바닥을 방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 방은 분명 자동차가 질주하던 공간이었다. 이들은 길바닥에 신문지 한 장씩 깔고 앉았다. 유연했다. 2002년 월드컵은 체육사·사회사 말고 도시사·건축사에도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이 거대한 방을 딱히 호칭할 단어가 없었으매 우리는 서양의 비슷한 그것, 광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 광장과 많이 달랐다. 룸이 방이되 방이 아닌 것처럼.
 
이 거대하고 초현실적 방의 목격은 곧 광장조성사업으로 이어졌다. 군림하던 자동차를 밀어내고 시청 광장과 광화문 광장을 만들었다.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도시가 필요했고 새로운 공간이 제공된 것이다. 광화문 앞은 더 이상 세종로가 아니었다. 이 길을 독점하던 자동차도 이동하는 밀실이다. 오로지 자동차가 어디론가 삭막하게 질주하던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한 풍경은 분명 발전이고 성취였다.
 
그런데 광화문 광장이 여전히 문제다. 보행자와 자동차와의 기능적 공간구분 방식에 불만이 생겼기 때문이다. 광장이 아니고 도로로 둘러싸인 섬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현상공모 진행하고 당선작 뽑았는데 여전히 이견 분분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곳이 자동차보다 보행자 중심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데 반대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견은 논의 과정과 구현 방법이다. 이 중요한 논의가 간단히 정리된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역사는 질주하지 않는다.
 
문제다. 문제 해결법의 하나는 문제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탈모의 대안에는 발모제 도포, 모발 이식 외에 삭발도 있다. 광화문 광장의 문제가 도로와 보행공간의 기능적 이분법이라면 이 구분을 없애는 것도 대안이다. 아스팔트 깔린 세종로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일단 공간 전체를 석재 깔린 보행자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자동차는 꼭 검은 아스팔트 위에 흰 차선 도색한 도로로만 다닐 수 있는 기계는 아니다. 석재 위로 가변차선 표시하고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자동차 통행 통제하면 된다. 그리고 자동차들이 송구스럽고 조심스럽게 이 위를 다니면 된다. 원래 우리의 방은 그렇게 유연한 것이다.
 
방의 가치는 위치에 있다. 광화문 광장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대한민국이 무엇인지 시각적으로 대답하는 위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선출된 자가 세습한 자 앞에서 만세삼창 하는 나라 아니다. 인민의 이름만 걸고 독재권력 전횡하는 나라도 아니다. 폭력과 절규가 아니라 축제와 환호로 정치적 집단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나라다. 화염병·최루탄 아니고 신문지 한 장으로 충분하다고 증명한 나라다. 바로 이 공간에서.
 
광화문 광장은 민주공화국의 모습을 과정과 결과로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아마 룸이나 광장과 다른, 우리의 방일 것이다. 미래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기대가 우리의 힘이다. 교육계 경험이 증언하노니 우리의 다음 세대는 앞 세대들보다 참으로 낫더라. 미래의 광화문 광장은 은밀하던 앞 세대 밀실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방이 될 것이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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