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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휘의 한반도평화워치] 쿠르드족 사태의 교훈, 한반도는 예외인가

중앙일보 2019.10.25 00:26 종합 30면 지면보기

냉혹한 국제정치 속 한·미 동맹의 갈 길

지난 20일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 거점 지역에 주둔했던 미군 차량들이 이라크로 철군하고 있다. 철군에 분노한 일부 쿠르드 주민들은 미군 차량에 쓰레기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EPA=연합뉴스]

지난 20일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 거점 지역에 주둔했던 미군 차량들이 이라크로 철군하고 있다. 철군에 분노한 일부 쿠르드 주민들은 미군 차량에 쓰레기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EPA=연합뉴스]

터키·이라크·시리아 등에 걸쳐 자리 잡은 자그로스 산맥과 타우루스 산맥 동쪽 지역은 전통적으로 쿠르디스탄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쿠르디스탄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쿠르드족은 약 4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간 공동체이다. 쿠르드는 현존하는 종족 중에서 근대 국가를 만들지 못한 세계에서 가장 큰 집단이다. 원래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에 연합국 대표와 술탄 대표가 조인한 세브르 조약에서 아르메니아 남쪽에 쿠르디스탄 국가를 승인한다고 규정했으나, 터키의 강력한 군사 지도자 케말 아타튀르크 치하에서 이 조약은 끝내 실현되지 못한 약속에 그쳤다.
 

국익에 앞서는 국제 약속 없고
한쪽만 이익 얻는 동맹도 없어
호혜적 이익 관계를 만들어
한·미 동맹의 정당성 확보해야

지난 9일부터 시작한 터키의 쿠르드족 공격으로 30만 명의 피난민과 6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외 언론은 지난 수년간 국제 테러 집단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에서 쿠르드족 거주 지역 내 군사 거점 건설과 쿠르드 민병대의 협조가 절실했던 미국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IS 잔류 세력이 군사적으로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미국은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고, 일종의 미군의 보호 아래 있던 쿠르드가 터키의 타깃이 된 것이다. 물론 터키는 자국 내에 약 15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쿠르드인들의 군사적 배후지인 시리아 내 쿠르드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자국의 안보를 지킬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가는 잠재적으로 이기주의자
 
쿠르드족 사태와 관련해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첫째, 트럼프 행정부의 이기적인 처사를 비난해서 기분이 조금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지구 위에 존재하는 국가들은 모두가 잠재적으로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를 최우선 정책 기조로 내건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에서 자국 군인의 신변을 보호하고, 국제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영예를 누리며, 석유 자원의 글로벌 공급망 장악 등과 같은 이해관계에 충실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과거의 경우 글로벌 질서 유지를 위한 미국의 희생은 어떤 형태로든 자국의 이익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더구나 어떤 정책이 비용이고, 어떤 정책이 이익이 되는지 즉각적인 셈법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은 세계 경찰로서 국제 안보와 국제 평화를 위해 일종의 무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외교정책 하나하나가 어떤 손실과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 상대적으로 정확한 예측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를 비난하는 일도 무의미해지고 있다. IS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쿠르드 민병대 1만 명의 희생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둘째, 2017년 한반도를 감도는 불안과 안보 위기를 뒤로하고 2018년 이후 북·미간 전격적인 협상 국면이 전개되었다. 중동과 동북아의 안보 지형과 지역 질서는 천양지차다. 하지만 미국의 이해관계가 급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전략무기를 한껏 자랑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을 가리켜 ‘로켓맨’이라고 으름장을 놓던 트럼프 대통령과, 싱가포르에서 북한에는 장밋빛 미래가 있다고 강조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분명 동일인이다. 하지만 미국의 국내 정치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미국의 국가 이익 극대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서로 다른 미국 대통령일 수 있을 것이다.
  
한·미 동맹도 미국 이익 따라 변화
 
다시 말해 2017년에서 2018년으로의 상황 변화를 논리적으로 깔끔하게 설명하기 어렵듯이, 지금의 협상 국면이 급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터키의 쿠르드족 침공이 미국의 책임이라고 비난하는 우리의 판단이 도덕적 기준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셋째, 한·미 동맹은 북한이라는 위협 요인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억지하는 목적을 핵심 근거로 삼고 있다. 현재의 동맹을 최초로 맺었던 1953년 10월과 비교해서 지금의 한·미 관계는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의 변화를 경험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굳건한 동맹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국제 질서에서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
  
그동안 한·미 동맹은 윈-윈 게임
 
이론적으로 동맹 관계는 세 가지 질문을 구성한다. 동맹은 왜 생겨나는가? 한 번 생겨난 동맹은 어떤 방식에 의해 유지되는가? 마지막으로 안보 환경의 변화에 직면하여 동맹 관계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냉전 초기 한국의 생존을 지키고 공산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한·미 동맹은 생겨났다.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국제안보경제 시스템 안에 안착했고, 미국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지속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서로가 의미 있는 선물을 주고받았고 결과적으로 윈-윈 게임이었다. 이제 중국의 성장과 북·미 협상이라는 구조적인 환경 변화에 직면하여서 한·미 동맹은 어떤 정당성의 논리 위에 서야 하는가?
 
쿠르드족은 공식적인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은 쿠르드와 공식적인 동맹 관계를 약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IS를 상대로 한 대테러 작전 시기만을 놓고 본다면 미국과 쿠르드는 일종의 의사(疑似) 동맹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동의 정세 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고민이 없었던 미국과 쿠르드의 협력은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사상누각(沙上樓閣)이었을 수 있다.
 
한·미 동맹과 비교하기에는 비약과 무리가 심하다. 하지만 미국의 국가 이익에 우선하는 어떤 국제적 약속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일방만이 이익을 취하는 동맹 관계는 있을 수 없다. 이익의 고갈을 확인한 미국이 쿠르드를 떠나듯이, 미국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지속해서 자신의 이익을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에서 호혜적인 동맹 관계의 논리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끊임없는 전략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핵화 협상 진전 따라 한·미 동맹의 미래 고심해야
국가 간 동맹 관계는 교환을 전제로 한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는데 동맹 관계라는 공고한 외교 관계가 지속할 수는 없다. 동맹은 일방이 제공하는 안보 확약과 다른 일방이 제공하는 일부 주권적 공유 사이의 거래다. 이런 이유에서 동맹 관계는 일반적으로 서로 비슷한 힘을 가진 국가들끼리보다는, 상대적인 강대국과 상대적인 약소국 사이에서 더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 보자면, 한·미 동맹은 한반도 안보에 대한 미국의 확약과 군사 작전·운용에 대한 지휘권을 양보한 주권적 공유 사이의 약속이다.
 
동맹국 간 협조 관계는 군사적 의미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유니폼을 입은 미군이 과거 국내 곳곳의 군사 기지에 진을 쳤지만, 그 유니폼은 서구 민주주의, 자유로운 사고방식, 효율적이고 편리한 서양 문명, 심지어 간편하지만 칼로리가 높은 음식 문화까지 국내로 실어 날랐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동맹 관계를 포괄적 동맹이라고 부른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가 동북아에 매몰되지 않고 탈(脫)동북아적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한·미 동맹만큼 신뢰할만한 외교·안보 자산도 드물다.
 
스톡홀름 ‘노딜’에도 불구하고 북·미 협상이 계속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와 동시에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실시할 것이라는 믿음은 차츰 사라지고 있다. 남·북·미가 안고 있는 각자의 이유로 인해 북한 비핵화 협상은 어떤 형태로든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한·미가 어떤 동맹 정당성을 새롭게 확보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선, 현재 진행되는 전시작전권 전환을 둘러싼 이슈들이다. 한미연합사의 지휘 구조 문제와 방위 역량 유지 문제는 한·미가 적극 고민 중이므로 큰 걱정이 없다. 하지만 유사시 본토로부터의 증원 문제와 유엔사령부 지위 변경 문제는 수면 하에 잠복해 있는 뜨거운 감자라고 생각한다.
 
둘째, 한·미 동맹이 동북아 지역 안보에 대한 책임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을 수 있다. 더는 주적(主敵)이 북한이 아니라면 한·미 동맹이 지역 안보를 위해 기능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중국의 압박을 이겨내는 외교 전략과 정책 옵션을 강구해야 한다.
 
셋째, 동맹 유지를 둘러싼 국면마다 각종 현안, 예를 들면 방위비 분담금 문제, 한·미·일 협조 체제, 군사 훈련의 수위 조절 등 운용의 묘를 발휘해야 하는 문제들과 관련한 논쟁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근대 국가 건설에 실패한 쿠르드족이 정세 변화와 미국의 셈법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상황이지만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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