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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에 세월의 굴곡을 거풍한다, 내 몸을 씻는다

중앙일보 2019.10.24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46)

 어려서 철봉에 매달려 노는 걸 좋아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머리를 땅으로 향하면 구름과 달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하나도 가리는 게 없어서 그러는 것일 거다. [연합뉴스]

어려서 철봉에 매달려 노는 걸 좋아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머리를 땅으로 향하면 구름과 달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하나도 가리는 게 없어서 그러는 것일 거다. [연합뉴스]

  
하늘 느낌
길도 휘청이는 동구 밖
흔들리지 못 하는
가난한 솟대가 어슷하니 서 있다
떠올랐다간 담아두고 마는 도돌이표 침묵
 
우리 대신 부끄러워 낯을 가리는 달과
누군가의 휘파람이 되려고 입술 오므린 별들
해 저물녘 온통 둥글게 충혈된 미소
여전히 뒷 그림처럼 번져가고
풀잎 하나 베어 문 바람결은
세월의 작은 굴곡 하나 놓치지 않았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바라본 구름처럼
한걸음에 다가와 지켜보는 들꽃 까치 다람쥐
눈동자들은 하늘을 닮아 둥글었구나
동심원 같은 눈물이 일렁이고
 
종종 무언가 잊어버리는 것 같아도
하늘이 그냥 잃어버리는 건 없었다
 
해설
각자에게 추억을 되살리는 물건이 있다. 어떠한 물건을 마주치면 문득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사진 unsplash]

각자에게 추억을 되살리는 물건이 있다. 어떠한 물건을 마주치면 문득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사진 unsplash]

 
우리는 어떤 물건이나 장소와 마주쳤을 때 불현듯이 오래된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가끔은 향기로운 냄새나 특이한 음식 맛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기도 한다. 기분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덧붙여지면 더 그런 것 같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어떤 끈으로 연결되는 느낌을 받는다.
 
어릴 적 동창들과 단체여행이라도 할라치면 더욱 과거로 시간여행을 재촉한다. 육십 중반의 나이가 무색해질 만큼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하루를 뜻깊게 지내다 돌아온다. 동창들과 매해 한 차례 버스 여행을 해왔다. 사회 분위기 탓인지 왕성했던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음주가무로 분위기를 망치는 일도 점차 삼가게 된다.
 
오가는 버스 안 정경도 많이 바뀌었다. 요즘엔 작은 이동식 강연회가 벌어진다. 취하지 않고 말짱한 정신으로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체험했던 이야기를 옛 추억과 곁들여 풀어낸다. 어떤 분야가 됐던 30여년을 지키다가 이제 막 은퇴하거나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는 소회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사업에 실패했던 이야기와 지금 어떻게 마무리 짓고 있는지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징징대거나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나이가 지났다는 게 이렇게 편하게 다가올 줄 몰랐다.
 
아무리 하찮은 이야기라도 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체험과 진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몰랐던 새로운 분야의 식견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꼭 교수나 전문인이 아니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엔 모두 탁월하다. 평소에 과묵한 줄로만 알았는데 새삼 달리 보이는 친구가 여럿이다. 외국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토론 문화가 부러웠는데 우리도 조금씩 적용되는 것 같아 반갑다.
 
유명 관광지나 사찰, 트래킹 코스도 좋았지만,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 관람과 다른 조각공원 관람 등이 기억에 남는다. 어디든 단체로 예약하면 해설사를 붙여주어 깊이 있는 배경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주최 측이 꼭 알려주고 싶은 주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행상 짜임새 있는 시간 배분도 이점이다.
 
고 박수근 화백의 『공기놀이하는 소녀들』. [중앙포토]

고 박수근 화백의 『공기놀이하는 소녀들』. [중앙포토]

 
박수근 화백은 이름 없고 가난한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성을 추구했다. 우리 산하에 널린 거친 화강암의 질감을 표현해 한국미의 한 분야를 개척했다. 모든 예술에서 ‘형태와 질감’은 창조성의 양면성이다. 마치 빛이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만족하게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역량은 눈으로 보고 만지는 듯한 질감 표현에서 차별된다.
 
동자승이 팔베개하고 들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새긴 조각품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주었다. 코스모스를 입에 문 채 누워 다리를 꼰 모습은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을 사라지게 한다. 머리를 꼿꼿하게 세웠을 때보다 누우면 하늘과 구름, 별이 내게 쏟아지는 듯 보인다. 누구나 체험했을 것이다. 겸손하게 땅에 엎어지면 하늘이 더 잘 보인다.
 
어려서 철봉에 매달려 노는 걸 좋아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머리를 땅으로 향하면 구름과 달이 도리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하나도 가리는 게 없어서 그러는 것일 거다. 이중섭 화가의 어린아이 그림에도 밑천을 드러내고 기거나 거꾸로 매달려 노는 아이 그림이 많다.
 
조각공원 곳곳에 솟아있는 솟대는 옛 그리움과 정취를 품어내었다. 엄지 굵기의 솟대는 억새나 갈대, 들풀과 달리 바람에 쉬이 흔들리지 않아도 바로 일어서지 못한다. 대개는 기우뚱하고 기울어져 있다. 처음엔 꼿꼿하게 꽂아두었어도 세월이 가면 어슷하게 주저앉는다. 솟대는 자기가 나이 먹어가는 걸 그런 식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어슷해져 낮추는 자에겐 하늘이 더 자세하고 가깝게 자신의 속내를 풀어낼 것 같다. 이름 없는 들꽃의 향기를 맡으며 바람결에 세월의 굴곡을 거풍하면 군내 나던 내 몸뚱이가 풋풋하게 바뀔 것만 같다. 가만히 지금 여기에 머물면 까치도 다람쥐도 찾아와 말을 걸 듯싶다.
 
60 중반이 넘어가니 친구들의 자발적 침묵과 정신적 가난이 왠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모두가 나보다 훨씬 생활의 고수들이었다는 존경심을 표하며 건강과 우정이 지속하기를 바라본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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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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