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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금강산 청산 “남측시설 싹 들어내라”

중앙일보 2019.10.24 00:54 종합 1면 지면보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을 찾아 “남측에서 지은 시설물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다고 북한 관영 매체들이 23일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김 위원장이 인민들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종합적인 국제관광문화지구로 꾸릴 구상을 갖고 금강산 지구를 현지지도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지난 16일(보도일 기준) 백두산에서 백마를 타며 중대 결심을 예고했던 김 위원장이 금강산 시설 철거 선언으로 한·미에 제재 해제의 통첩장을 던졌다.
 

남측서 1조원대 들어간 사업
“남북관계 상징 된 건 잘못된 일”
한국·미국·유엔 삼중제재망 겨냥
‘해제 안 하면 독자적인 길’ 압박

금강산 발언 의미
김정은 “격리병동 같은 시설” 폄하
김정일의 ‘첫사랑’ 현대와 단절
선대와 단절 각오한 결정 분석
“남북 공유물 아니다” 독자개발 뜻

김 위원장은 “(남측이) 금강산에 꾸려 놓은 시설들이 민족성을 찾아볼 수 없는 범벅 식이고, 피해지역의 가설막이나 격리병동처럼 들어앉았다”며 “그것마저 관리가 되지 않아 남루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또 “지금 금강산이 마치 북과 남의 공유물처럼 북남관계의 상징, 축도처럼 돼 있고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 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 잘못된 인식”이라고도 했다.
 
현대그룹이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금강산 지역을 50년간 임차해 관광사업을 하기로 합의했던 게 잘못이라는 지시다. 시설을 뜯어내고 향후 북한이 직접 관광사업을 주도하겠다는 예고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들어내라“고 지시한 금강산관광지구. ① 1998년 11월 관광이 시작된 이후 현대아산은 온정각·문화회관 등을 신축하고, 김정숙휴양소와 기존 금강산호텔을 고쳐 호텔로 사용했다. ② 관광 초기 사용하던 해상호텔과 고성항 횟집(③)도 남측이 설치했다. [노동신문=뉴시스·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들어내라“고 지시한 금강산관광지구. ① 1998년 11월 관광이 시작된 이후 현대아산은 온정각·문화회관 등을 신축하고, 김정숙휴양소와 기존 금강산호텔을 고쳐 호텔로 사용했다. ② 관광 초기 사용하던 해상호텔과 고성항 횟집(③)도 남측이 설치했다. [노동신문=뉴시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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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와 현대아산에 따르면 정부와 현대그룹(현대아산)은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이래 9947억3000여만원을 투입했다. 남측 관광객의 숙박시설 및 부두, 도로 등 편의시설 건설에 현대 측이 3억2000만 달러(약 3751억7000만원)를 투자했고, 정부는 경영난을 겪은 현대를 지원하기 위해 지분 인수 방식 등으로 48억6000만원을 보탰다. 정부는 또 이산가족 상봉 면회소를 금강산 지구에 건설하는 데 550억원을 지출하기도 했다. 여기에 50년 임차비(9억4200만 달러, 약 1조1045억원) 중 관광대가 방식으로 5597억원을 북한에 건넸다. 하지만 이 같은 투자는 김 위원장의 ‘사망 선고’로 결국 북한에 넘어가거나 공중 분해되게 됐다.
 
2008년 7월 남측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 사건 이후 중단됐던 금강산 관광은 대표적인 한국의 대북 독자제재 대상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 관광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상 대북제재 대상은 아니지만 북한과 경제 협력을 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고 말했다.
 
2017년 채택된 안보리 결의 2375호는 북한과의 합작 사업 설립·유지·운영을 전면 금지했다. 금강산 관광을 위해 남북 합작을 한다면 이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 2375호는 북한 노동자 고용도 금지했다. 즉 모든 유엔 회원국 국민과 기업은 북한에 상업적 목적의 투자를 하거나 북한 국적자를 채용할 수 없다.
 
김정은 “선임자들 잘못” 이례적 선대 정책 비판

 
이설주가 금강산지구 내 삼일포로 추정되는 곳에서 김 위원장의 뒤를 따르고 있다. [노동신문=연합뉴스]

이설주가 금강산지구 내 삼일포로 추정되는 곳에서 김 위원장의 뒤를 따르고 있다. [노동신문=연합뉴스]

이런데도 김 위원장이 현장을 직접 찾아 관광 종료를 언급한 것은 한국과 미국의 독자 제재 및 안보리 제재 등 ‘삼중 제재망’을 한꺼번에 겨냥했다는 분석이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한국에는 ‘더 이상 남북 경협에 기대지 않겠다’는 메시지인 동시에 미국에는 ‘외교적 관여의 문을 닫기 전에 제재 문제에서 유연한 입장을 들고 오라’고 양보를 요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이 직접 연말을 비핵화 협상의 시한으로 못박은 상황에서 미국이 제재 해제를 하지 않을 경우 판을 뒤엎고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라는 압박이다. 북한은 이미 “지금까지의 모든 조치들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떠밀리고 있다”(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8월 31일 담화)는 식으로 핵실험 및 장거리미사일 시험 재개를 위협했다.
 
북한이 공식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5년 7월 금강산에서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가족을 만나 “사람에게 있어서 첫사랑이 중요하다. 우리는 북남 관계에서 당국보다 훨씬 앞서 현대와 첫사랑을 시작하였다”(『김정일 장군의 통일일화』)며 금강산 관광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도 김 위원장은 선대의 권위를 훼손했다는 정치적 부담을 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금강산이 10여 년간 방치돼 흠이 났다”며 “국력이 여릴(약할)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정책이 매우 잘못됐다”고 지목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선임자들’이 아버지인지는 불분명하다. 통일부 내부와 북한 전문가들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을 보좌했던 당시의 실무 책임자들을 지칭한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의 전례없는 ‘선임자들’ 비판은 선대 정책과의 단절로 비치는 것을 각오하고 내린 결정이란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남측과의 금강산 관광 단절을 선언하면서도 “남측 관계부문과 합의하여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은 지난 3월부터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제외한 일체의 직접 접촉을 삼가고 있는데, 금강산 관광 남측 시설물의 철거와 관련해 접촉의 장이 마련될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나 남북이 금강산 관광 문제로 협상에 나설 경우 북한은 ‘관광 재개’와 ‘남측 철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미국은 관광 재개를 위한 제재 해제는 비핵화와 속도를 맞춰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금강산 관광 문제가 다시 한·미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용수·유지혜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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