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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가늘고 길게’ 가는 정년퇴직의 로망

중앙일보 2019.10.24 00:06 종합 32면 지면보기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한 공기업 부장으로 일하는 50대 중반 A씨는 임원 승진 대상에 오를까 걱정이 태산이다. 그의 목표는 60세 정년을 꽉 채워 퇴사하는 것. 임원이 되면 연봉도 뛰고 대우도 좋아지지만, 2년 임기가 지나면 옷을 벗을 가능성이 크다. “두 자녀의 대학교 학자금을 지원받는 기간도 늘어난다”는 게 그가 부장 자리를 지키려는 또 다른 이유다.
 
배경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처럼 승진을 꺼리는 경우는 흔하다. 은행권의 일부 차장급 직원은 은행원의 꽃이라는 지점장의 꿈을 버린 채, 승포자(승진 포기자)를 자처한다. 승진해도 연봉·복지 등에서 큰 차이가 없으니 차라리 스트레스 덜 받고 오래 직장을 다니겠다는 것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는 과장급 승진에 앞서 사무직을 버리고 생산직으로 직종을 바꾸는 게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노조원 신분을 지켜 고용불안에 떨지 않기 위해서다.
 
취업포털 ‘커리어’의 이달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속 승진의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하겠나’라는 질문에 ‘우선 미루고 고민해본다’는 응답이 24.6%, ‘거절한다’ 가 20.9%나 됐다. ‘거절한다’의 이유로는 ‘승진이 빠른 만큼 조기 퇴직·명예퇴직 등이 빨라질까 봐’(43.2%)가 1위로 꼽혔다.
 
정년퇴직은 줄고, 조기퇴직은 늘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정년퇴직은 줄고, 조기퇴직은 늘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굵고 짧게’는 많은 직장인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조기퇴직이 일상화하면서 이젠 ‘가늘고 길게’가 시대의 모토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60세+α’ 정년 연장 방안의 방향은 틀리지 않다고 본다.
 
다만 선결과제가 있다. 개개인의 역량과 무관하게 근속 기간이 길수록 임금이 올라가는 연공서열형 임금체계, 성과를 전혀 못 내는 근로자조차 교체하기 어려운 경직된 노동시장 구조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생산성은 떨어지고 기업의 부담은 늘어나는 부작용만 커지게 된다.
 
2013년 60세 정년이 법제화해 2016년 정착됐지만 퇴직한 55~64세 취업 경험자 가운데 조기퇴직자는 늘고(2016년 9.6%→올해 12.2%), 정년퇴직자는 오히려 줄어든(8.2%→7.1%) 게 하나의 방증이다.
 
정부의 취지는 청년 일자리를 뺏지 않으면서 기업들은 장년층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런 필수 조치는 쏙 빼고 정년연장 필요성만 강조하다간 둘 다 놓칠 수 있다. 잇단 ‘친노동’ 정책으로 노동 유연성에 역주행하고 있는 게 지금 정부 아닌가? 자칫하다간 ‘굵고 짧게’도, ‘가늘고 길게’도 아닌 ‘가늘고 짧게’ 가는 수가 있다.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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