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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동의했다면, 남의 정자로 인공수정한 자녀도 친자”

중앙일보 2019.10.24 00:05 종합 2면 지면보기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3일 A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을 열어 각하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중앙포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3일 A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을 열어 각하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중앙포토]

아내가 남편의 동의를 받아 다른 사람의 정자를 이용해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자녀와, 아내가 혼외 관계로 낳은 자녀 모두 친자식으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 등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친생자 추정을 부인할 수 있다는 취지의 36년 전 판례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대법, 남편 친생부인소송 각하
“아내가 혼외관계로 낳은 자식도
상당기간 이의 제기 안해 친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3일 A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낸 친생자 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 상고심을 열어 각하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부부는 남편 A씨의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자 1993년 다른 사람의 정자를 받아 인공수정을 통해 첫째 아이를 낳고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4년 후인 97년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A씨는 무정자증이 나은 것으로 생각해 이번에도 부부의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마쳤다. 그러나 사실 부부의 둘째 아이는 아내가 혼외 관계를 통해 낳은 자식이었다. 2013년 부부 갈등으로 이혼 소송을 하며 A씨는 두 자녀를 상대로 친생자 관계가 없음을 확인해 달라며 친생자 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민법 844조는 혼인 중 아내가 임신하면 일단 남편의 친생자로 여긴다. 이를 깨뜨릴 수 있는 경우는 8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인정한 ‘부부가 따로 사는 등 외관상 명백한 사정’일 때다. 이조차 2년이 지나면 소송 제기가 불가능하다.
 
A씨는 소송을 제기하며 자녀 둘 다 친생 추정의 예외에 해당한다며 친생자 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2심 모두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유는 달랐다. 1심은 83년 대법원 판례에 따라 두 자녀 모두 “친생 추정 예외 사유에 해당하는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친생 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2심은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난 첫째 자녀에 대해 A씨가 인공수정에 동의했기 때문에 친생자로 추정한다고 판단했다. 둘째 자녀에 대해서는 친생자로 추정되진 않지만 A씨가 이 사실을 알고도 상당 기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양 관계가 성립된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A씨는 둘째 자녀가 태어나고 10년이 지나서부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유전자 검사에서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더라도 친자식으로 추정된다”고 판단했다. 혈연관계 여부를 기준으로 친생자 추정 원칙이 미치는 범위를 정하는 것은 민법 규정에 배치되고 법 취지에 반한다는 것이다. 친생 추정 규정의 본래 입법 취지가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고 자녀의 법적 지위를 신속히 안정시켜 법적 지위의 공백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친생자 추정 원칙은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를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고만 정하고 있을 뿐”이라며 “혈연관계의 존부를 기준으로 그 적용 여부를 달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부부가 동의해 인공수정을 통해 출산한 경우 친생자 관계 부정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다만 남편 A씨는 둘째 자녀에 대해서는 친생 부인의 소를 제기해 친생자 관계를 부정할 수는 있다. 이 경우 소송의 쟁점은 ‘언제 친자식이 아닌 것을 알았는지’가 된다.
 
과학 기술 발달로 인공수정 등 다양한 형태의 임신·출산이 많아진 만큼 자연스레 친생 추정의 예외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이 같은 판단으로 예외 사유를 좁게 인정한 기존 판례가 유지되게 됐다.  
 
백희연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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