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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자에 얽매이면, 자유여행도 싱거운 관광이 된다

중앙일보 2019.10.21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52)

사람 성격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자유 여행의 성격도 제각각이다. 하나라도 더 찾아다니려는 사람, 하나를 봐도 자세히 보려는 사람, 현지 분위기를 느끼려는 사람....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필요한 정보도 전부 다르다. [사진 박헌정]

사람 성격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자유 여행의 성격도 제각각이다. 하나라도 더 찾아다니려는 사람, 하나를 봐도 자세히 보려는 사람, 현지 분위기를 느끼려는 사람....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필요한 정보도 전부 다르다. [사진 박헌정]

 
‘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 한 달 여행의 두 번째 나라인 루마니아 브라쇼브에서 일주일째다. 한 도시에서 열흘이면 비교적 넉넉한 일정이라 바쁠 일 없이 가깝게는 집 뒤편 마을광장이나 카페, 멀게는 시 외곽이나 이웃 도시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며칠 전에 아내와 30분 거리에 있는 소도시 라스노브(Rasnov)에 다녀왔다. 갈 때는 터미널에서 시간 맞춰 버스를 탔지만 올 때는 표지판도 없는 정거장에서 차가 언제 올지도 모른 채 기다리다가 어느 운전자가 태워주어 시내 초입까지 들어와 시내버스를 탔다. 티켓 자판기에서는 2회권만 팔았는데, 한번 사용하고 어제 다시 쓰려다 미심쩍어 검색해봤더니 50분 이내 환승용이라 해서 그냥 버렸다. 미리 알았으면 두 명이 한장만 사도 되었다.
 
사전에 충분한 정보로 위험을 통제하고 여행효율을 높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앞선 이들의 경험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나 스스로 나를 재촉하게 되고 결국 내가 어떤 여행을 원했는지 잊을 수도 있다. [사진 박헌정]

사전에 충분한 정보로 위험을 통제하고 여행효율을 높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앞선 이들의 경험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나 스스로 나를 재촉하게 되고 결국 내가 어떤 여행을 원했는지 잊을 수도 있다. [사진 박헌정]

 
인터넷에는 많은 여행정보가 떠돈다. 자유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 정보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여행을 마친 후 또다시 자기 경험담을 올리니 정보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의외로 정보 내용은 다양하지 않다. 대부분 ‘어디서 무엇을 하라’는 ‘지시’다. 여행 책자도 그렇다. 뭘 보고, 뭘 먹어보자… 따르지 않으면 여행효율이 낮은 것처럼 느껴진다. ‘훈수’도 있다. 정류장 티켓자판기 사용법처럼 직접 부딪쳐보면 될 일까지 일일이 설명한다.
 
수긍하기 어려운 정보도 있다. 맛집 소개의 경우, 정말 맛있을까에 대해 의문이다. 객지에서 여러 식당을 경험하고 비교한 것도 아닐 텐데 그 지역을 처음 찾는 사람은 그 정보를 믿고 찾아가고, 또다시 후기를 써서 대물림한다. 알고 보면 ‘맛있는’ 보다는 ‘리스크 없는’ 식당이다.
 
여행하며 헤매는 건 당연한데 이런 정보들은 그걸 ‘사고’로 여겨 리스크를 원천 차단하려는 것 같다. 물론 안전한 여행을 준비해야 하고 짧은 시간에 최대한 좋은 경험을 하려면 시행착오도 줄여야 한다. 나 역시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남긴 정보를 열심히 살핀다. 그래야 고생을 덜 한다.
 

자유 여행을 하다 보면 아무리 사전정보가 많고 대비를 철저히 해도 의외의 변수 때문에 당황할 때가 많다. 그게 자유 여행의 묘미이고 그럴수록 추억이 늘어간다. [사진 박헌정]

 
하지만 사람 성격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자유 여행의 성격도 제각각이다. 하나라도 더 찾아다니며 보려는 사람, 하나를 봐도 천천히 자세히 보는 사람, 뭘 보기보다 현지 분위기를 느끼려는 사람, 이 세 범주 안에서도 수천 가지로 나뉠 테니 필요한 정보도 전부 다르다.
 
나의 경우, 배낭 메고 유레일 패스 끊어 돌아다니던 시절과 달리 이제 유명한 것 찾아다니는 여행에는 별로 관심 없다. 이 사람들이 뭘 먹고 사는지, 뭘 하고 노는 지, 성격이 어떤지, TV에선 뭐가 나오는지… 그런 게 궁금하고 쉬운 해설을 통해 그 나라를 넓게 이해하고 싶다.
 
한 집을 빌려 열흘간 생활하다 보니 당장 이 도시의 음식쓰레기 처리법부터 궁금하고, 역사적으로 헝가리와 루마니아가 치열하게 뺏고 빼앗겼던 이곳 트란실바니아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이 잘 지내는지 어떤지도 궁금하다. 그런데 물어볼 사람이 없다. 원하는 만큼 알려면 서로 다른 성향과 환경의 루마니아 친구 서너명은 필요할 것 같다.
 
자유로운 계획과 일정으로 현지인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게 자유 여행의 장점이다. 단체 패키지여행만큼 편하거나 쾌적할 수는 없다. [사진 박헌정]

자유로운 계획과 일정으로 현지인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게 자유 여행의 장점이다. 단체 패키지여행만큼 편하거나 쾌적할 수는 없다. [사진 박헌정]

 
자유 여행은 말 그대로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고 때로는 위험을 수반한다. 그래서 많은 정보, 때론 ‘매뉴얼화’된 정보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 자유를 조절해야 하는데, 기존의 경험과 새로운 도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남의 경험에만 의지해서 떠나면 또다시 그런 정보만 반복 생산한다.
 
비슷한 정보로 움직이니 첫날 "좋은 여행 하세요." 인사하고 헤어졌던 사람을 계속 만나기도 한다. 다른 방향으로 튀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누가 차를 잘못 타거나 엉뚱한 길로 들어가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재미있고 신선하다.
 
언어나 제도가 다른 낯선 곳에서 당황하고 헤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것을 리스크나 실수로 규정할수록 우리는 틀에 박힌 여행을 경험하게 된다. [사진 박헌정]

언어나 제도가 다른 낯선 곳에서 당황하고 헤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것을 리스크나 실수로 규정할수록 우리는 틀에 박힌 여행을 경험하게 된다. [사진 박헌정]

 
획일화된 여행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만일 시장에 수천 가지 상품이 있는데 색깔별로 노란색은 kg당 만 원, 빨간 건 오천원… 이렇게 판다면 우리는 수긍할까? 맛있는 딸기를 사 먹으면서도 노란 참외를 보면 분통 터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변의 많은 여행이 그런 느낌이다. TV홈쇼핑에선 유명 관광지를 광고하며 그게 그 나라의 전부인 것처럼 호도한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체코 프라하 야경…. 아무리 장사라지만 ‘거기 안 갔으면 그 나라 안 가본 것’이란 말은 심하다. 자유 여행자들 역시 그런 광고에 현혹되기 쉽다.
 
여행하면 할수록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낯선 세상에 대한 편견이 점차 해소되는 과정 같다. [사진 박헌정]

여행하면 할수록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낯선 세상에 대한 편견이 점차 해소되는 과정 같다. [사진 박헌정]

 
우리는 여행 책자에 배정된 지면에 따라 여행지의 가치를 부여하는 데 익숙하다. 큰 곳부터 시작해서 작은 곳까지 다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 달 만에 유럽 40개국’ 식의 무용담이 나온다. 대부분 프랑스, 독일 같은 서유럽 선진국부터 시작해서 동유럽은 여행 후반부에 들르는데, 그 비중과 순서가 여행 책자와 비슷하다. 뒤로 갈수록 여행의 피로감 때문인지 그 나라들에 대한 근거 없는 짜증과 편견이 느껴지고 정보의 질도 현저히 떨어져 온통 ‘물가 싸서 뭘 실컷 사 먹었다’는 내용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 여행 묘미는 직접경험을 통해 그동안의 편견을 하나씩 지워나가며 그 사회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게 그 시작이다. 정보는 정보로서 존중하고 잘 이용하되,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발자취에 얽매여 내 여행의 크기를 너무 줄이는 것은 손해일 것 같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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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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