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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위에 용의 꿈틀거림을 새기다

중앙선데이 2019.10.19 00:20 657호 19면 지면보기

하이엔드 시계 조각장인 올리비에 & 도미니크 보쉐

리차드 밀 RM 57-03 투르비용 사파이어 드래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리차드 밀 RM 57-03 투르비용 사파이어 드래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스위스의 300년 된 시계장인 가문에서 태어난 올리비에 보쉐(Olivier Vaucher·65)가 고향인 뇌샤텔 근처의 라 쇼 드퐁 예술학교에 다니고 있을 무렵, 시계 업계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파텍 필립 정도를 제외하면 무브먼트 제작 스타일은 거개가 엇비슷했다. 게다가 기계식에 비해 정확하고 간편하며 저렴한 쿼츠(Quartz) 무브먼트가 새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비바람이 몰아칠 참이었다.
 

리차드 밀 등 최고급 시계 전담
초정밀 인그레이빙 기법의 대가
부인이 그리고 남편이 새기는 식
“손기술과 정밀기계의 조화 추구”

손재주가 뛰어났던 보쉐는 은퇴를 앞둔 아버지가 석영을 조각해 샘플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당시 제네바 최고의 조각 아틀리에로 꼽히던 ‘블럼 줄리그(Blum et Züllig)’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손기술을 익혔다. 4년이 지난 1978년, 스물 넷의 젊은이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아틀리에를 만들고 독립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시계 표면을 인그레이빙(engraving)기법으로 멋지게 장식하는 ‘아트 다이얼’이었다.
 
올리비에 & 도미니크 보쉐 부부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올리비에 & 도미니크 보쉐 부부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꾸준히 명성을 높여가던 그의 작업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한 살 어린 반려자 도미니크(Dominique)였다. 엑상 프로방스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그림을 전공한 그녀는 남편과의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부인과 열정적이고 직설적인 남편은 서로의 장점을 곧 합쳤다. “우리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왔습니다. 올리비에는 3차원을 표현하는 조각가고, 나는 2차원의 평면에 자신을 표현하기 좋아하는 화가지요. 그가 시계 제작에 이 두 가지 기법을 같이 적용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 처음엔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의 열정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곧 우리의 기술이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조각을 통해 아이디어, 기술 및 형태를 창조하면서 시계에 생명을 불어 넣습니다.”
 
2003년 본격화된 이들 ‘환상의 커플’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정보는 창조적 생활로 가는 열쇠다(Information is key to creating life)”라고 홈페이지에 적힌 문구는 보쉐 부부의 최신 기술 트렌드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올리비에는 이렇게 말한다.
 
올리비에 보쉐의 수작업. 레드 골드로 용의 머리를 만들고 있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올리비에 보쉐의 수작업. 레드 골드로 용의 머리를 만들고 있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학교에서 배운 조각 기술은 살아남긴 했지만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사람이 하는 조각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손으로 하던 조각 기술을 동일하게 재현하기 위해 최신 기술도 이용합니다. 나의 가장 큰 기쁨은 조각과 관련된 모든 가능성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전통 기법과 첨단 기술을 같이 활용해 우리는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고 예전보다 더 미세한 조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올리비에 보쉐의 수작업. 레드 골드로 용의 머리를 만들고 있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올리비에 보쉐의 수작업. 레드 골드로 용의 머리를 만들고 있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21세기 들어 수집가들을 위해 독특한 스타일의 한정판 시계 제작 열풍이 본격화되면서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시선은 이들에게 쏠렸다. 반 클리프&아펠, 오데마 피게, 에르메스가 제작을 의뢰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2005년 창립 25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아폴로의 전차와 마스크 시리즈도 이들 몫이었다.
 
사파이어 블록을 조각해 만든 용의 몸통을 플레이트에 앉히고 있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사파이어 블록을 조각해 만든 용의 몸통을 플레이트에 앉히고 있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특히 리차드 밀(Richard Mille)이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꿈틀대는 용의 형상을 손으로 제작해 탑재한 RM 57-03 투르비용 사파이어 드래곤(TOURBILLON SAPPHIRE DRAGON)은 보쉐와 그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17명 장인의 예술혼이 집약된 최신작이다. 사파이어 블록을 조각해 용의 몸통을 만들었고, 머리와 발은 레드 골드로 제작했다. 태양과 불을 상징하는 황금빛 용과 붉은색 여의주, 물을 뜻하는 푸른 사파이어는 음양의 조화를 추구한 것이다. 특히 ‘화룡점정’인 용의 혀와 눈은 극도로 미세한 공정을 통해 완성됐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주얼리 디자이너 김성희씨는 “사파이어의 경도는 1800비커스(vickers·모오스 경도 9)로 이를 가공하기 위해서는 사파이어보다 경도가 높은 다이아몬드 툴을 사용해 수작업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정교함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사파이어 블록을 조각해 만든 용의 몸통을 플레이트에 앉히고 있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사파이어 블록을 조각해 만든 용의 몸통을 플레이트에 앉히고 있다. [사진 Jerome Bryon, 보쉐 홈페이지, Philippe Louzon]

게다가 5등급 티타늄 소재의 베이스 플레이트를 기반으로 극도의 스켈레톤 구조로 되어있어 움직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점은 리차드 밀만의 매력이다. 이 시계는 오직 55개만 생산하는 한정판으로 아시아에서만 런칭한다. 케이스는 카본 TPT 및 다양한 소재로 출시되는데, 이중 5개만 올 사파이어 케이스다.
 
도미니크 보쉐는 이렇게 말한다. “장인 정신으로 제작된 시계는 볼 때마다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만든 사람들의 혼을 공유하고 있는 시계는 많은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시계가 시간 말고 다른 차원의 무언가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떤 시계를 갖든 아무 의미가 없을 겁니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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