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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불꺼진 이태원 미술관에서 재즈가 흘러나온다면…

중앙일보 2019.10.18 10:00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그룹 MMBP의 설치작품 ‘머머레이션’. [사진 현대카드]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그룹 MMBP의 설치작품 ‘머머레이션’. [사진 현대카드]

흐르는 음악을 붙들 수 있을까. 18일 서울 이태원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시작하는 ‘RE:ECM’은 이러한 질문을 품고 있는 전시다. 1969년 독일 뮌헨에서 설립돼 지난 50년 동안 최고의 재즈 레이블로 거듭난 ECM의 역사를 ‘다시 보기(Replay)’하는 동시에 현재와 소통하는 컨템포러리 뮤지션을 부지런히 발굴해온 이들의 지금 이 순간을 ‘일시 정지(Pause)’하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레이블 ECM 50주년 기념전
1600장에 실린 음악 한자리서 즐겨

ECM은 ‘에디션 오브 컨템포러리 뮤직(Edition of Contemporary Music)’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만프레드 아이허 대표 덕에 철저한 아티스트 맞춤형 녹음 스타일을 고수해 키스 재릿, 얀 가바렉, 칙 코리아 등 세계적인 뮤지션을 배출하는 것은 물론 이곳에서 앨범을 발매한 것만으로 곧 뉴스가 되는 독특한 위상을 확립했다. 재즈로 시작했지만 클래식·뉴에이지·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17일 열린 ECM 50주년 전시 ‘RE:ECM’.기자간담회에서 참석한 ECM의 정선 프로듀서. [연합뉴스]

17일 열린 ECM 50주년 전시 ‘RE:ECM’.기자간담회에서 참석한 ECM의 정선 프로듀서. [연합뉴스]

개막에 앞서 17일 기자들과 만난 ECM의 정선 프로듀서는 “그동안 ECM에서 발매된 음반이나 커버 아트를 모아서 하는 아카이빙 형태의 전시는 몇 번 있었지만, 음악을 듣고 거기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 위주의 전시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설명했다. 지휘자 정명훈의 차남인 정선씨는 2012년 ECM에 영입됐다. 이듬해 아내이자 재즈 보컬리스트인 신예원의 앨범 ‘루아야’를 시작으로 지난해 NEQ 3집 ‘니어 이스트 콰르텟(The Near East Quartet)’ 등 한국 가수 앨범 제작에도 물꼬를 텄다. 
 
국내외 작가 6팀의 작품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음악을 보다 친근하게 만들어준다. 영국 작가 샘 윈스턴이 미국 음악가 존 케이지의 음반 ‘애즈 잇 이즈(As It Is)’의 수록곡 4곡을 듣고 그린 드로잉 ‘비트윈 노이즈 앤 사운드(Between noise and sound)’를 선보이는 식이다. 첫 번째 줄이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첫인상이라면, 두 번째 줄은 악기, 세 번째 줄은 주변 소음 등으로 분리해 음악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여섯 줄에 걸쳐 쌓아 나간다. 
 
영국 작가 샘 윈스턴이 존 케이지의 음악을 듣고 만든 ‘비트윈 노이즈 앤 사운드’. [사진 현대카드]

영국 작가 샘 윈스턴이 존 케이지의 음악을 듣고 만든 ‘비트윈 노이즈 앤 사운드’. [사진 현대카드]

샘 윈스턴은 “존 케이지는 ECM이 쌓아온 음악적 유산을 대표하는 뮤지션 중 한 명이자 듣는 행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 사람”이라고 그의 음악을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곡명처럼 ‘4분 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은 그의 실험적인 무대 덕에 많은 사람이 일상을 채우는 다양한 소리 역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만든다”는 것이 곧 ECM이 추구하는 미학이기도 하다.
  
영국 런던 기반의 크리에이티브 그룹 MMBP는 설치작품 ‘머머레이션(Murmuration)’을 선보인다. 50년간 ECM에서 발매된 1600여장의 앨범 중 220장의 커버 아트를 선별해 수백 마리의 새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MMBP의 멜리사 마토스는 “ECM에서 발매된 앨범 커버 아트를 살펴보면 각기 다른 아티스트라 해도 하나로 연결되는 ‘흐름’과 ‘일관성’을 찾을 수 있다”며 “덕분에 하나의 풍경화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한국 작가 서현석+하상철이 VR로 구현한 ‘평행선’ 등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체험할 수 있다.  
 
독일 사운드 디자이너 마티스 니치케가 만든 설치작업 ‘스몰 플레이스’. [사진 현대카드]

독일 사운드 디자이너 마티스 니치케가 만든 설치작업 ‘스몰 플레이스’. [사진 현대카드]

지하로 내려가면 전시장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음악의 정체를 만날 수 있다. ECM 설립자인 만프레드 아이허와 키스 재릿이 레코딩 도중 탁구를 하는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공간이다. 독일 사운드 디자이너 마티스 니치케는 “프로듀서와 뮤지션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음악을 만드는 모습이나 완성된 음악이 청중을 만나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탁구와 비슷한 것 같다”고 밝혔다. 1600여장의 앨범에 수록된 전곡이 1380시간 동안 쉼 없이 흐른다. 57.5일 주기로 한 번씩 회전하는 셈이다. 
 
밤 동안 문 닫은 전시관에도 음악을 흐르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니치케는 웃으며 “집에서도 절대 음악을 끄는 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늘어져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장 곳곳에 빈백을 마련해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정도면 음악을 소유하진 못해도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시는 내년 2월 29일까지.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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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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