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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의 시시각각] 조국만이 아니다

중앙일보 2019.10.18 00:28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미국 클린턴 정부 재무장관이던 로버트 루빈은 씨티은행 회장으로 10년간 일하면서 1500억 원에 달하는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씨티은행을 지급불능 상태로 몰아넣고는 퇴직금만 챙겨 사라졌다. 천문학적 규모의 정부 재정을 쏟아 붓게 만들었지만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티 파티’와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일상화된 건, 이런 월가의 ‘먹튀 문화’에 미국인들이 깊은 분노와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론 반대 많고 정책 실패 드러나
꼬인 국정, 총체적 난맥상 보여도
안 바꾸고 경질 않는 이유는 뭔가

투자에 성공하면 엄청난 상여금을 챙기고, 실패해도 높은 연봉에다 두둑한 퇴직금이 예정된 펀드 운용자라면 행동과 책임의 균형이 거의 없는 거다. 손실은 모두 주주와 납세자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어쨌든 돈을 번다. 그런 얄미움과 뻔뻔함, 위선과 반칙이 조국 사태의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탈탈 털고 조롱하는 데 앞장섰다. 늘 공정과 정의를 내세웠다. ‘적폐 수사’를 모두 더하면 100년 형을 넘긴다. 그런데 자기가 털릴 일은 더 차고 넘친다니 루빈이 들어도 혀를 찰 ‘먹튀’다.
 
중요한 건 이익만 챙겼지 도무지 책임을 지지 않는, ‘먹튀 국정’이 조국 사태만도 아니란 점이다. 영구 정지를 향해 돌진하는 월성원전 1호기가 우선 그렇다. 7000억원이나 들여 보수한 멀쩡한 원전을 폐쇄하고 앞으로 100조 원을 쏟아 부어 태양광, 풍력을 늘리겠다는 게 이 정부의 떼고집이다. 매년 수조원 흑자를 내던 한전은 거액 적자에, 부채가 120조 원을 넘어섰다. 얼마 전엔 드디어 ‘전기료 인상’을 거론했다. 부담을 결국 국민과 주주에 떠넘기겠다는 선언이다.
 
싫어하는 대통령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뜯어내는 4대강 보(洑)가 마찬가지다. 엄청난 세금 들여 만든 국가 시설물을 또 엄청난 세금 들여 때려 부순다. 서민경제 붕괴의 소득주도 성장이 그렇고, 멍든 동맹 외교도 가락이 같다. 이 정부의 대표 상품들이 죄다 역대 최악의 숫자를 만들고 있지만 도무지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고 책임을 묻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조국 전 장관의 사퇴마저 ‘개혁을 시도하다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란 식이다.
 
당장 ‘검찰 개혁의 큰 동력이 됐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가가 그렇다. 물론 ‘갈등 야기해 송구스럽다’는 사과를 곁들이긴 했다. 하지만 대체로 남 탓이 넘쳤다. 조 전 장관을 감쌌고, 책임은 검찰과 언론에 돌리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니 청와대든 여당에서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그냥 가자는 거다. 루빈식 먹튀 정책 재검토와 책임자 경질까지 기대한다면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것이다.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쪼개진 화난 민심엔 변화가 없을 게 뻔하다.
 
미국 금융위기를 예측하고 경고했던 나심 탈레브 뉴욕대 교수는 세계의 모든 위기를 초래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인으로 ‘책임지지 않는 인간’을 꼽았다. 신간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에서 루빈을 대표 사례로 들며 ‘책임지지 않는 사람에겐 현실 문제의 해결을 맡기지 말라’고 충고한다. 루빈 사태를 겪은 뒤 월가의 헤지펀드는 행동과 책임의 균형을 묻는 쪽으로 개편됐다. 펀드 운용자가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을 쏟아 넣지 않으면 펀드에 들어가는 걸 꺼리는 분위기가 생겨서다.
 
나랏 일이야 말할 것도 없다. 책임을 엄하게 묻는 게 출발점이다. 문 대통령은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 드리겠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여론조사 결과는 모두가 본다. 하지만 이 정부 출범 후 그런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언젠가 “국민 통합을 외면하면 이명박 정부와 같은 실패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국민 통합으로 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없다.  
 
3800여년 전 바빌론 광장 비석에 새겨진 함무라비법의 중심 원칙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책임만큼 행동한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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