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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문화난장] 이수성·박한철의 인생 스승 김석진

중앙일보 2019.10.17 00:29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팔순의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저 큰 분’ 앞에서 “저는 허물뿐인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20여 년 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분께 (해법을) 전화로 여쭸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어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 마이크 앞에 섰다. “20여 년 전 이분에게 『주역』(周易)을 처음 배웠다. 공직생활 36년 중 큰일이 생겼을 때 나름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에 책임진 건 모두 『주역』 덕분”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일 토요일 오후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새로 쓴 대산 주역 강의』 출판기념회에서다.
 

『주역』 대가 92세 김석진
20년 만에 새 강의록 펴내
제자 13명과 1년간 협심
“낮추고 살면 모두가 평안”

이날 전 총리·헌재소장은 예우를 다하며 새 책을 펴낸 스승 앞에서 축사를 했다. 나라 안팎으로 극도로 어려운 요즘, 이 책이 우리 정치·종교 등 지도층에 경종을 울리기를 바란다는 마음도 전했다. 여기서 스승은 올 아흔둘인 대산(大山) 김석진옹이다. 『주역』 대중화의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김옹은 여섯 살 때 한문을 배우기 시작해 평생을 동양 고전과 함께했다. 1985년 이후 전국을 돌며 주역 강의를 펼쳐왔다. 그간 그의 강의를 들은 각계 인사가 7000여 명에 이른다.
 
김옹은 『주역』을 동양 최고의 경전으로 꼽는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점술·예언서가 아니라 자연·우주의 이치를 농축한 철학서로 본다. 동양 5000년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겼다고 생각한다. 국가·조직·개인의 오늘을 따져보고, 내일을 열어가는 열쇠로 삼아왔다. 공자도 일찍이 『주역』에 열 가지 해석을 붙이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했다. 김옹은 무엇보다『주역』의 진취성을 주목한다. 운명이란 미리 결정된 게 아니라 언제든 새로 바꿔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스승을 딛고 일어서는 제자가 없다면 학문이든 사회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웅덩이에 갇혀 썩어가는 물이 될 수 있다. 이날 행사는 그런 면에서 빛났다. 스승과 제자의 이인삼각 경기를 보는 듯했다. 김옹이 20년 전 펴낸 『주역 강의』에 제자 13명이 달라붙어 ‘21세기판 주역 강의’를 빚어냈다. 주역의 효(爻)·괘(卦)가 생경한 일반인에겐 다소 부담스럽지만 친근한 구어체로 기술돼 있어 찬찬히 따라갈 만하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에 대한 덕담을 잊지 않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인 이애주 경기도 문화의전당 이사장(서울대 명예 교수)이 지난 12일 스승 김석진옹의 학문을 기리는 축하무를 추고 있다. [사진 김정환]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인 이애주 경기도 문화의전당 이사장(서울대 명예 교수)이 지난 12일 스승 김석진옹의 학문을 기리는 축하무를 추고 있다. [사진 김정환]

▶김석진=“사람도 책도 나이를 먹어가며 연륜을 더한다. 20년 전 책에 모두 칭찬을 했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그간 새로 깨달은 것도 많다. 내 나이 90이 넘어 눈이 침침하고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기가 어려워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자들이 책을 나눠 교정을 보게 했고, 내가 다시 읽으며 수정했다. 책을 내는 것 자체보다 괄목상대(刮目相對)·청출어람(靑出於藍) 제자들이 더 반갑고 고맙다.”
 
▶윤상철(대유학당 대표)=“지난해 6월 스승께서 새 책을 제안하셨다. 옛날 텍스트를 새로 입력하고, 제자들이 1863쪽 방대한 분량을 분담·정리·교정했다. 스승과 하루 서너 번 넘게 통화해가며 고치고, 또 고쳤다. 학자로서 한 글자라도 더 가르치려는 선생님을 더 우러러보게 됐다. 옛날에 주자(朱子)도 죽기 사흘 전까지 『대학』 주석을 고쳤다고 한다. 사제 인연을 맺은 33년 시간보다 지난 1년이 더 벅차다.”
 
주역 특강을 하고 있는 김석진옹.

주역 특강을 하고 있는 김석진옹.

김옹은 이날 200여 하객 앞에서 ‘수출서물(首出庶物) 만국함령(萬國咸寧)’ 특강도 했다. 세상(서물)의 지도자(수출)가 바로 서야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주역』의 한 대목을 설명했다. 이어 군주의 시대를 뛰어넘는 민주의 시대를 여는 방편으로 ‘무수길’(無首吉) 석 자를 꺼내 들었다. 훌륭한 지도자라면 마치 자기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해져야 국민들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분열과 대립이 최고점에 달한 요즘 시국에 대한 꾸짖음으로 들린다. 보수든 진보든 자신만을 앞세우지 말고 상대부터 받아들이라는 주문일 터다.
 
그렇다고 『주역』이 어정쩡한 타협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우주 만물의 시작을 혼돈, 즉 태극(太極)으로 본다. 양(陽)과 음(陰)의 분화·갈등·대립·폭발·교체를 자연스런 순리로 해석한다. 개인도, 나라도, 세계도 변화에 변화를 겪으며 성장하는 까닭이다. 다만 그 갈등을 줄이고, 최악을 막는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특히 통치자의 선택이 결정적이다. ‘무수길’의 지혜를 되새길 시점이다. 조국 사태로 너무나 큰 고통을 겪은 우리이지 않은가. “순리대로 하면 돼요. 인간의 도리를 다하면 모두가 잘 살게 됩니다.” 노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당부다. 이토록 쉬운 길이 또 있을까.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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