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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트럼프의 현상 유지 작전

중앙일보 2019.10.16 00:10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스톡홀름의 북·미 실무회담은 결렬됐다. 이는 연내 북·미뿐 아니라 남북 정상회담도 가능하다고 군불을 지핀 사람들에겐 실망스런 소식이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놀라운 결과가 아니다. 왜 그런가.
 

‘완전한’ 비핵화 할 의사 없는 북한
재선 전 현상 유지하려는 트럼프
이 구조 변화 없인 회담 성공 난망
비핵화 기회, 위기 이후에 올 수도

결렬을 예상했던 근본 이유는 현 시점에선 미국이 원하는 완전한 비핵화를 김정은이 수용할 의사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일부 비핵화만 하고 그 대가로 모든 제재 해제와 체제안전 보장, 그리고 경제지원을 받고 싶어 한다. 성공한다면 남은 핵과 미사일을 보유함으로써 실질적인 핵보유국이 될 수 있다. 북한의 이 의도는 영변 핵시설과 경제 제재의 교환을 시도했던 하노이 회담에서 이미 드러났다.
 
‘현상 유지’에 대한 미·북 정상 간의 입장 차이도 결렬이 예상됐던 주요 이유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현상 유지는 괜찮은 대안이다. 그러나 김정은에겐 악몽과 같다. 트럼프는 북한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중단한 지금 상태로 재선에 임해도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김정은은 경제 위기의 여파가 내년에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느긋한 반면 김정은은 급하다. 협상 결렬 후의 발표문도 뚜렷이 대비된다. 미국은 ‘70년 동안의 적대적 유산을 한 차례의 과정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반면 북한은 ‘우리를 크게 실망시켰다’며 조급함을 드러냈다.
 
트럼프가 내년 재선을 앞두고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도 고려 사항이다. 그가 고대하는 트윗은 이럴 것이다. “김정은과 FFVD(최종적이며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에 합의, 3년 내 모든 핵시설·핵물질·핵과 미사일의 완전 폐기를 담은 로드맵 만들어, 그 첫 단계로 영변 핵시설을 한 달 내 폐기하기로. 나는 그가 너무 좋다!” 이 수준과 거리가 먼 비핵화 합의는 트럼프의 재선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딜이 아닐 바에야 그에겐 현상 유지가 더 낫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현상 유지 작전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재개해 트럼프의 재선에 결정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압박이 그의 카드다. 그러나 이는 꿀벌의 침과 같아서 쓰는 순간 자기도 죽는다. 거래의 달인 트럼프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속 타는 김정은이 각종 발사체로 도발을 해 보지만 미국은 북한이 협상 트랙을 뛰쳐나갈 약간의 빌미도 주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그 카드를 정말 실천에 옮긴다면 국제사회는 미국의 ‘화염과 분노’를 지지할 것이다. 이 상황이 트럼프의 재선에 도움 될 여지마저 있다.
 
현상 유지 작전은 미국의 스톡홀름 협상 안에 반영됐을 것이다. 미국 협상 팀은 ‘영변+알파’ 정도의 비핵화에 대해선 낮은 단계의 인센티브, 즉 제재 해제 없이 미·북간 외교 관계 개선이나 북한 경제개발 방안 등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미·북 공동연락사무소 개설, 원산관광특구 개발과 북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 지원 등의 ‘창의적 해법’이 그것이다.
 
미국이 광물 제재 유예나 해제를 제안했다면 이는 완전한 비핵화에 준하는 빅딜을 전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외신은 ‘영변+알파’의 대가로 광물과 의류 제재를 3년 동안 유예하는 방안을 미국이 제시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제재의 핵심인 광물 제재가 이렇게 풀리면 남은 비핵화를 위한 추동력이 사라져 북한은 실질적인 핵보유국이 된다. 이 점을 미국 정부와 협상 팀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매우 유리한 부등가 교환이 제안됐다면 트럼프의 갑작스런 변심 외에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재선에 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딜을 그가 과연 원했을까.
 
회담 결렬 후 북한이 미국을 거칠게 비난한 점도 초기 비핵화의 보상 조치로 광물 제재 해제가 제안됐다고 보기 어렵게 한다. 북한은 이 제재를 가장 고통스럽게 여긴다. 광물 수출은 군과 당 등 국가 기관의 주 수입원이고 김정은을 비롯한 권력층의 최대 소득원이다. 한 때 북한 수출의 60% 가량을 차지했던 광물 수출의 이윤 마진은 80% 가량으로 추측된다. 2위 수출품목인 의류의 이윤 마진이 20%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보더라도 이 제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미국이 실제 이런 제안을 했다면 실무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실무 협상은 다시 열릴 수 있다. 그러나 연내 실무 협상에 이어 정상회담까지 성공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기회는 오히려 위기 이후에 찾아 올 것 같다. 북한 경제가 붕괴 직전이거나 미·북 대립이 위험 수위에 도달할 때라야 비로소 김정은은 협상 목표의 수정을 고려할 것이다. 그 전엔 위협적 언사와 도발로 긴장을 한껏 고조시키는 전략으로 미국을 압박하려 들 것이다.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는 남아 있다. 걱정은 트럼프가 변심해 ‘가짜 비핵화’에 광물 제재를 풀어주는 경우다. 이 때 한국은 플랜 B 외에 대안을 찾기 어렵다. 우리 정부에 플랜 B는 과연 있을까.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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