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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남은 소송 관계없이 직고용” vs “그랬다간 배임”

중앙일보 2019.10.16 00:03 종합 24면 지면보기

점거농성 38일째 ‘전쟁터’된 한국도로공사

경북 김천 한국도로공사 본관 로비에서 농성 중인 톨게이트 수납원들. 이들은 자회사 행을 거부한 채 본사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지난달 9일부터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경북 김천 한국도로공사 본관 로비에서 농성 중인 톨게이트 수납원들. 이들은 자회사 행을 거부한 채 본사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지난달 9일부터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정문으로 들어서자 본관 건물을 포위한 현수막부터 눈에 들어왔다. “요금 수납원 직접고용 대법원 판결 이행!” “우리는 일하고 싶다” “우리는 끝까지 간다”. 붉은색 현수막은 야산으로 나 있는 직원 산책로까지 빽빽하게 걸려 있다. 뒤쪽으로 돌아가자 경내를 점령한 텐트 수십 개가 보였다. 건물 안 농성자들을 지원하는 민주노총 노조원들이 ‘야외 농성’을 벌이는 텐트들이다.
 

자회사행 거부 수납원들 본관 점거
사태 장기화 직원·주민 피해 호소
한국노총은 ‘조건부 직고용’ 합의
여권선 “민노총이 현실 외면” 절레

경북 김천 혁신도시에 위치한 한국도로공사 본사. 지난달 9일 톨게이트 수납원 250여명이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본관 로비를 점거한 이후 한 달 넘게 ‘전쟁터’로 변했다. 농성 한 달째인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중재로 ‘조건부 직접 고용’을 내용으로 하는 노사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민주노총은 이에 반발해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기자가 현장을 찾은 것은 합의 이틀 후인 11일. 공사 관계자는 “합의로 한국노총 계열 수납직 노조원들이 농성을 철회해 그나마 현장 정리가 좀 된 편”이라고 말했다.
 
외부인의 건물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공사 측은 “기자도 예외가 없다”며 건물 내 취재를 거절했다. 지상 출입구는 아예 용접해놓았다. 외부인이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직원과 민원인은 이중 삼중의 신원 확인을 거쳐 지하주차장 출입구를 이용하고 있다. 현재 로비 농성 인원은 190명 정도. 건강 문제로 인한 이탈자나 업무 복귀자들이 다수 생겼다. 로비 농성자들은 확성기를 통해 건물 밖 농성자들과 연합 집회도 갖고 있다. 하루 두 번씩 식사와 생필품 반입은 허용되며, 물과 전기도 공급되고 있다. 그러나 차가워진 날씨와 환기 부족 때문에 감기를 앓는 농성자들이 많다고 한다.
 
농성 장기화로 공사 직원들과 인근 주민들은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한 직원은 “아침마다 정문에서 본관까지 노조원들이 도열해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구호를 외치고, 때로는 야유를 퍼부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고 말했다. 사내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일부 직원들은 노조원들을 피해 아이와 함께 정문 옆 임시 돌담길을 이용하기도 한다. 인근 아파트 주민, 상가 입주자 등도 밤낮으로 계속되는 확성기 소음 등에 시달리고 있다며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공사 본관 옆 벽에는 “너무 힘들어요! 동료가 될 우리! 농성은 이제 그만!”이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한국노총 소속의 본사 노조가 내 건 현수막이다.
  
대법원 판결이 ‘도화선’
 
지난 9일 국회에서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중재로 이강래 도로공사 사장과 박선복 톨게이트 노조 위원장이 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국회에서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중재로 이강래 도로공사 사장과 박선복 톨게이트 노조 위원장이 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로공사는 2009년 이후 수납업무를 전면 외주 용역회사로 돌렸다. 그러나 수납원들은 실질적으로는 본사에서 근로 지휘와 감독을 하고 있다며 도공을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세 차례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그중 2013년 최초로 제기한 소송이 지난 8월 29일 대법원에서 수납원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판결 직전인 7월 1일 도공은 톨게이트 수납업무를 전담하는 자회사 한국도로공사서비스㈜를 출범시켰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정부 방침에 부응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6500여명의 수납원 중 자회사 전환에 동의한 5100여명은 자회사의 정규직원이 됐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나머지 1400명이 소송을 이어갔다.
 
도공은 대법원 판결에 따라 389명을 본사 정규직으로 새로 채용했다. 문제는 아직 1, 2심 계류 중인 수납원 1040명. 이들 모두를 재판과 관계없이 본사 정규직으로 채용하라는 것이 민주노총의 요구다. 도공의 불법 파견 사실이 대법원 판결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사 측은 재판을 계속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5년부터 공사 관리자가 영업소에서 철수하고, 영업소 용역 계약도 100% 공개 입찰을 거치는 등 파견법 위반 소지를 없앴기 때문에 남은 재판 결과는 기존 대법 판결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재판을 포기 못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돈 문제다. 도공 측은 “소송에는 자회사와 본사 간 급여 차이에 따른 임금 청구 건이 병합됐는데, 재판 결과 청구액이 25%가량 깎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로 재판을 포기하면 배임 책임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결국 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중재에 나섰다. 진통 끝에 지난 9일 ▶2심 계류 중인 인원은 직접 고용 ▶1심 계류 중인 인원은 1심 판결에 따라 조치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도공 주장대로 대법 판결까지 가지 않더라도, 최소 1심 판결은 받은 뒤 이를 확정판결로 갈음하자는 취지다. 이로써 2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115명이 구제받게 됐다. 합의에 따라 한국노총은 농성을 철회했으나, 민주노총은 ‘야합’이라며 반발하며 농성을 풀지 않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어떤 ‘정규직 업무’ 줄까 고민
 
대법 판결과 을지로위원회의 중재로 도공 본사는 정규직원 500명 가량(대법 판결 대상자 389명+을지로위원회 중재 대상자 115명)을 새로 채용하게 됐다. 1심 판결 결과에 따라서는 900명 이상의 정규 직원을 또 채용할 수도 있다. 도공은 이미 올 1월 고속도로 안전원 980여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일반직 4500명을 포함해 정규 직원이 최대 7000명 정도로 늘어날 수 있다.
 
최대 1400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정규직 업무’를 부여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정규직으로 합류한 수납원들은 4주간의 교육을 거쳐 ‘조무직 업무’를 부여받는다. 현재 검토되고 있는 업무는 고속도로 버스정류장, 졸음 쉼터, 법면(도로 주변 경사면) 등의 환경 정비 업무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업무를 맡게 된 근로자들의 불만과 갈등이 계속될 소지도 있다. 이들을 전국 56개 지사에 배치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겨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톨게이트 업무를 자회사로 이양했기 때문에 본사에서는 수납업무 부여가 불가능하다는 공사 입장은 확고하다. 공사 관계자는 “법원에서도 직원들의 업무 배치는 경영권 재량 범위에 속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고 말했다.
  
고용 유지 위해 ‘스마트 톨링’ 계획 수정
 
도로공사 본사 정규직 노조가 내건 농성 중단 호소 현수막. [연합뉴스]

도로공사 본사 정규직 노조가 내건 농성 중단 호소 현수막. [연합뉴스]

공사는 자회사로 이전한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30%가량 올려주는 등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나 고용 안정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하다. 농성 근로자들은 “수납 업무가 줄어들면 자회사는 언제라도 없어질 수 있어 자회사 정규직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도공 측은 수납 자회사를 ‘기타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근로자들을 달래고 있다. 기타 공공기관으로 지정되면 정부로부터 정원과 급여·근무조건 등을 통제받기는 하지만, 신분보장만큼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2020년 도입을 목표로 한 ‘스마트 톨링’ 계획도 수정됐다. 달리는 차량의 번호판을 인식, 속도를 줄이지 않아도 통행료 과금이 되게 하는 기술이다. 완전 무인이 가능한 기술이지만, 도공은 현금수납 차로를 그대로 두기로 계획을 바꿨다. 도입 시기도 법령 정비 등을 이유로 2023년 이후로 늦췄다. 도공 관계자는 “스마트 톨링이 도입되더라도 현금수납 차로 존치, 영상 판독 및 보정, 과적 단속 필요성 등 때문에 350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하다”며 “현재 평균 54세 정도인 수납원들의 정년 도래 등으로 인위적 구조조정 없이 조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권서도 민주노총 성토 분위기
 
을지로위원회 중재에 대해 민주노총 관계자는 “노동자 갈라친 을지로위원회는 자본과 노동을 오가는 거간꾼에 지나지 않는다”며 맹비난했다. 그러나 을지로위원회 우원식 의원은 “단 한 번의 판결도 받지 않은 분들을 대법원 취지대로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것은 국민 동의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민주노총이 국민 눈높이에 맞는 결정을 내려줄 것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와 민주노총의 갈등도 감지되고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13일 기자들에게 경제 현안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톨게이트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란 건 눈에 보이지 않느냐”며 “노사가 합심하지 못하면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주노총은 “천박한 노동관을 가진 인사들이 청와대와 기재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며 반발했다. 노동계 지지를 기반으로 탄생한 정부에서 벌어지는 낯선 풍경들이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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